국제뉴스팀장 “바람 소리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중국 전국시대 말기, 천하통일을 앞둔 진나라의 왕 정(진시황)을 암살하려 떠나는 형가(荊軻)가 역수(이수이강)에 이르러 불렀던 노래다. 그가 우성(羽聲)으로 노래하니 그 소리가 강개해,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고 머리카락이 관을 찌를 듯 치솟았다고 한다. 수레를 타고 떠난 형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형가는 연나라의 태자 단으로부터 ‘진나라 왕을 위협해 제후들한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게 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으면 그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단은 위태로운 연나라를 구하고 싶었다. 형가는 진나라를 배반한 장수의 머리와 연나라 요충지의 지도를 갖고 가 진나라 왕을 만날 수 있었다. 왕이 지도를 펼치자 형가가 비수로 찔렀다. 왕의 몸에 닿지 않았다. 허둥댄 왕은 자신의 칼도 뽑지 못한 채 기둥을 돌며 쫓겨다녔다. 그러다 왕이 칼을 뽑아 형가를 내리쳤다. 형가는 기둥에 기대 웃으며 꾸짖었다. “일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진나라 왕을 사로잡아 위협해서 반드시 약속을 받아 내, 태자에게 보답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자객 열전’을 쓴 까닭을 “의기가 이뤄지기도 하고 이뤄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매우 분명하고 자신들의 뜻을 바꾸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어찌 망령된 일이겠는가”라고 했다. 후세에 이름을 남긴 암살자들은 수두룩하지만 암살에도 품격이 있다. 식민 통치자와 폭군, 독재자에 맞섰던 이들한테는 심금을 울리는 비장함이 있다. 대의명분이 있어, 얼굴이 드러나도 떳떳하다. 반면, 권력자가 자행한 암살은 추악하다. 주로 자신과 어깨를 겨룰 만한 정적들이 대상인데, 명분이 없어서 그런지 진짜 얼굴은 숨고 애먼 사람을 잡는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한테 혁명 동지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다. 온갖 암살 시도에서 용케 살아남았던 트로츠키도 멕시코시티에서 젊은 청년한테 살해당했다. 그의 본명은 라몬 메르카데르였지만, 자크 모르나르, 프랭크 잭슨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가 트로츠키를 암살할 수 있었던 건 애인 덕분이었다. 훤칠한 미남이었던 그는 1938년 프랑스에서 미국 시민권자 실비아 애걸로프한테 접근해 연인이 됐는데, 애걸로프의 언니가 트로츠키의 비서였다. 그는 1939년 캐나다 사업가로 위장해 멕시코로 간 뒤 애인을 불러들여 트로츠키한테 접근할 수 있었다. 1940년 8월20일 화창한 날 비옷을 입고 나타난 그를 트로츠키도 의심하지 않았다. 비옷 속에는 얼음을 깨는 송곳이 숨겨져 있었다. 송곳은 트로츠키의 머리에 박혔다. 경찰은 애걸로프가 연루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인을 대면시켰다. 메르카데르는 “나를 왜 데려왔느냐”고 경찰에 따지며, 그녀의 얼굴을 피했다. 애걸로프는 “이 살인자를 데리고 나가라”고 고함쳤다. 경찰이 ‘이 남자가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아니다. 이놈은 사랑과 우정, 모든 것을 배신했다. 내가 이 악당의 도구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며 욕을 퍼부어댔다.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김정남(46)을 공격한 두 여성은 몰래카메라 동영상을 찍는 줄 알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은 연예업계에 종사하고, 인도네시아 여성은 스파 마사지사로 일했다고 한다. 이들이 암살의 도구로 쓰인 사실을 깨닫더라도, 애걸로프처럼 악담이라도 퍼부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다.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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