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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20년 만의 외출 / 나효우

등록 2017-03-03 17:57수정 2017-03-03 21:22

나효우
착한여행 대표

얼마 전에 일본 홋카이도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는 시레토코 여행을 다녀왔다. 러시아 아무르강에서 흐르는 강물이 바다를 만나면서 영하 40도의 시베리아 겨울 찬 바람에 유빙이 되어 시레토코에 도착하는데 보통 2월초부터 3월말까지 볼 수 있다. 북위 44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북극에서나 볼 수 있는 유빙들을 볼 수 있으니 2월 중순께부터 시레토코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사람들만이 아니다. 플랑크톤 등 다양한 생물이 유빙과 함께 흘러오기 때문에 눈 덮인 시레토코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자연생태계를 만날 수 있다. 시레토코가 10여년 전에 일본의 4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이유다. 서울~부산 거리의 10배가 되는 4350킬로미터의 아무르강을 흐르면서 바위에 부딪히고 흘렀던 강물은 유빙이 되어 또다시 수천 킬로 떨어진 시레토코까지 긴 여정을 끝낸 후 마침내 바다가 된다. 그리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고 어느 산자락에 내리는 비가 되고 물줄기가 되어 긴 여정의 첫 여행을 하게 된다.

몇해 전부터 하얀 눈으로 덮인 시레토코에서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유빙을 맞이하러 몇몇 여행자와 이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 여행자들 중에는 신혼여행 이후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는 분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와 함께했던 여행자들 중에는 여러 형편 때문에 첫 나들이를 하는 분들이 많았다. 얼마나 망설이며 선택하고 여행길을 나서게 되었을까.

가끔 길을 함께 걷거나 밤에 술자리가 깊어지면 짓궂게 첫 나들이 소감을 묻는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자유롭지 않은 고단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들, 나이 들어 여행 가려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푼 두푼 모으기도 힘든데 여행은 무슨 여행이냐고 손사래치는 아버지들에게 자식들이 어찌어찌하여 보내드린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강물이 되어 수천 킬로를 흘러 바다에서 고단한 삶을 마무리하는 유빙처럼 나이 들어 첫 여행을 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큰 감동이다. “뭐라고 지금 느낌을 표현할 수 없는데요. 내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아, 내가 살아 있구나 싶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갑자기 울컥해진다. 뒤늦게 한글을 깨친 할머니에게 소감을 적어달라고 했더니 첫 문장이 “여행 가고 싶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냥 동네 한바퀴 어슬렁거리며 다닐 여유와 공간을 만들자. 마을여행으로 우리의 삶을 좀더 여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영어로 먼저 익숙한 레저(leisure), ‘여가’라는 단어는 “여유가 있는”이라는 뜻의 라틴어(licere)에서 온 것이다. ‘여가’는 노동과 직무, 일체의 책임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근로시간을 단축하여 좀더 창의적인 활동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가”의 시간과 공간을 배려해야 가족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 공동체가 여유롭게 된다. 마르크스의 딸 라우라의 남편이었던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Le droit ? la paresse)에서 “적게 일하고, 우리들의 창조적인 삶을 위해 기쁘게 시간을 보내자”고 한다. 심지어 게으르다는 것이야말로 ‘길들임’에 대한 반발이라고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도시 공간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전유공간이어야 하며, 작품과 참여의 도시, ‘축제’의 도시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말한다. 일상의 여행,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새로운 정부에서는 ‘문화관광여가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상의 행복은 여행을 일상화할 수 있는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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