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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적폐 청산’과 ‘미래’의 비극적 대결

등록 2017-04-12 18:08수정 2017-04-13 09:24

김종구

뜻이 있거든 촛불을 켜 올려 주기 바란다. 광장이 아니라도 좋다. 정갈한 책상 위에 촛불 한 자루 켜놓고 뚫어지게 응시하라. 실제의 촛불이 아니라 마음속에 촛불을 켜 올려도 좋다. 곧은 심지를 따라 기도하듯 하늘 오르는 불꽃(김영천 시인의 ‘촛불의 미학’)을 지켜보며 지난겨울 찬바람 부는 광장을 뒤덮었던 희망과 염원을 떠올리자.

적폐 청산, 정의, 공정…. 이런 단어들은 촛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였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 한명 한명의 가슴속에 켜진 촛불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틈엔가 이런 말들은 빛바랜 남루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봄날 흐드러지게 피는 화려한 벚꽃 속에 촛불의 불빛은 희미해졌고,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단어들은 비 맞은 낙엽처럼 땅에 떨어져 이리저리 발에 차이고 있다. 촛불은 이제 아련한 추억인가. 그것은 일과성 열풍에 불과했던가. 최근의 대선 상황을 지켜보면서 불현듯 떠올리는 질문이다.

적폐 청산과 미래는 결코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 동의어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적폐 청산의 궁극은 미래에 닿아 있다. 오랜 세월 우리를 짓눌러온 수많은 폐단과 잘못된 관행들을 깨끗이 치운 뒤에야 비로소 참된 미래도 열린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두 단어는 적대적 대립 관계가 되고 말았다. 서로서로 끌어안고 가야 할 단어들이 오히려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이로 변해 버렸다. 비극이다.

적폐 청산이라는 단어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진영에서조차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해가는 분위기다. 앞으로 문 후보 메시지의 중점을 ‘적폐 청산’에서 ‘미래’로 옮기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전략 수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적폐 청산 구호의 호소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도 분명하고, 이 구호가 문 후보를 과거에 얽매인 모습으로 비치게 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데도 안타깝다. 어차피 ‘시대정신의 담지자’를 자임하고 나섰다면 오히려 당당하게 정면돌파하는 자세가 옳지 않을까. 적폐 청산과 미래의 상관관계를 소상히 설득하고, 적폐 청산의 토대 위에서 펼쳐나갈 새로운 미래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 게 어정쩡한 후퇴보다 선거 전략상으로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미래라는 단어의 선점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그의 지지도 수직상승은 ‘과거 대 미래’란 프레임이 효험을 발휘한 덕도 크다. 그러나 안 후보가 말하는 미래는 왠지 불안하고 위태해 보인다. 탑을 쌓으려면 기초공사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 부실한 토대 위에 쌓는 미래의 탑은 무너지게 돼 있다.

안 후보를 향해 적폐 연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아직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하지만 적폐 연대는 선거 전이 아니라 오히려 선거 후에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 안 후보를 보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행로도 떠올린다.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한 원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집권 후 한동안은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보수의 길로 치달았고 종국에는 극도의 보수주의자로 정치적 생애를 마쳤다. 정치인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정서와 논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예고된 결말이었다. 지금 안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의 분포를 살펴볼 때 안 후보가 집권하면 그런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는 새로운 발상과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여건도 성숙했다. 보수는 앞으로 한동안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몰락했다. 지금의 야권이 마음먹기 따라서는 일본의 자민당과는 정반대로 진보개혁정당의 완벽한 국정 장악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묵은 때를 벗기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런데 적폐 청산과 미래가 예각으로 대립하면서 그런 희망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역사상 처음 맞은 야-야 대결의 대선을 지켜보면서도 별로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다.

뜻이 있으면 촛불을 켜 올려 주기 바란다. 그리고 두 손 모아 기원해주기 바란다. 겨우내 타올랐던 촛불이 벚꽃과 장미의 그늘 아래서도 유권자들의 마음속에서 세차게 타오르기를. 그래서 굳어버린 가슴을 녹이고, 연대의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확장으로 나아가기를. 그래서 끝내 적폐 청산과 미래가 손잡고 촛불이 염원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를.

편집인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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