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감독, 작가 지난달, 네덜란드의 영화학교 입학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눈이 파란 교수가 다음 프로젝트로 어떤 걸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헬조선과 미소지니”라고 답했다. 내가 당당하게 고유명사를 말하듯 ‘헬조선’이라고 하자, 교수 중 한 명이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헬 뭐라고요?”(Sorry. Hell, what?) 나는 ‘헬’은 영어의 그 ‘헬’이고 ‘조선’은 한국에 있었던 왕조라며, 젊은 세대들이 왜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지 설명했다. 한국 경제의 급속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병폐가 수면 위로 하나둘 드러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미소지니에 대해서는 한국의 여성혐오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예를 몇개 들었다. 그들은 2017년 한국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왜 짧은 시간 동안 ‘헬조선’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몇년 전부터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헬조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을 빼놓고는 지금의 한국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가을, 유럽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호스텔은 대학(원)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내가 묵던 도미토리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에서 온 학생은 공부도 공부지만 더치(Dutch: 네덜란드인)와 연애하는 것이 무척 기대가 된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노르웨이 학생이 쉽지 않을걸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유럽에서는 바(Bar)에서도 낯선 이에게 말을 잘 걸지 않는다”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도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자 스페인에서 온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러면 어떻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데이트를 하느냐고 물었다. 같은 유럽이라도 저렇게 다르구나. 마치 ‘비정상회담’을 보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그들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국은?” 나는 한국에서는 호감 있는 이에게 번호를 묻는 일은 가능하지만, 스토킹 같은 일도 빈번하다고 했다. 남녀가 평등해 보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고, 2016년에 일어난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그 대표적 사건이라고 했다. ‘몰카’가 어디에나 있고 맘만 먹으면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하자 모두들 놀란 눈치였다. “경찰은 무엇을 하냐” “정부는 단속하지 않느냐” 질문이 쏟아졌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손이 떨렸다. 분명 이 대화는 아주 가벼운 연애 이야기로 시작한 것 같은데. 나는 왜 멀고 먼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에 와서 ‘헬조선’을 설명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못 살겠다 하면서 매번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그곳에서도 한국의 뉴스를 들여다보며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은 왜 나의 몫인가. 어째서 부끄러움과 좌절은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자 목이 메었다. 누군가는 헬조선을 왜 자꾸 헬조선이라 부르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어도 이전과 같이 일상에서 혐오가 만연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나는 주저 없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나고 자란 이 사회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음으로 헬조선을 헬조선이라 불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