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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아름답고 씁쓸한 동맹의 추억 / 이본영

등록 2017-05-16 18:34수정 2017-05-16 19:05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내가 24년 전 사병 복무 때 겪은 일이다. ‘대항군’으로 설정된 특수부대원들의 침투를 막는 훈련을 했다. 공포탄으로 총격전을 하면 심판관들이 승패 판정을 했다. 어느 밤, 우리는 작전 투입을 위해 도열했다. 작전장교는 엄한 표정으로 반드시 방어 임무를 완수하라고, 패하면 외출이고 뭐고 없다고 을렀다. 이런 장면에서는 그대로 따르면 될 뿐, 사병들한테는 발언권이 없는 게 일반적이다.

한 병사가 용감하게도 침묵의 대오를 깼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장교 얼굴에서는 의외라는 반응과 호기심이 함께 묻어났다. “뭐야?” 병사는 유용한 질문을 꺼냈다. “공포탄이 모자라면 어떡합니까?” 맞는 말이었다. 대항군이 집중적으로 출몰하는 중요 시설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공포탄은 각각 15발에 불과했다. 한 번 드르륵 긁으면 끝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한 장교는 기발한 답을 내놨다. “미군 애들한테 좀 달라고 해라.” 옳거니! 우리 곁에는 혈맹 미군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한국 병사들은 하나만 비어도 경을 치는 탄피를 아무렇지 않게 사격장에 버리고 간다는 그들 아닌가? 우리가 중화기를 메고 숨이 넘어갈 듯 뛸 때 람보처럼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장갑차에 올라 “헤이~” 하고 손을 흔들며 앞질러 가는 그들이 아닌가?

비록 궁여지책이겠으나 한-미 동맹의 철저한 내면화가 그런 창조적 아이디어로 이어졌을 것이다. 참으로 경험 많은 지휘관다운 해법이었다. 무릇 혈맹이고 동맹군이라면 군량이 떨어지면 콩 한 쪽도 나누고 탄창이 비면 서로 채워줘야 하지 않겠나.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사드 값 1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한 점은 이런 아름다운 일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난하고 약한 동맹군이 허덕이면 람보처럼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잖나.

하지만 미국이 아무리 끈끈한 동맹이라 한들 공짜로 무기를 준다는 발상은 순진하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무기를 건네는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돈을 받고 파는 게 있다. 아니면 무상원조인데 이것도 순전히 공짜는 아니다. 오히려 돈 대신 ‘피’를 받아내는 목적이 주류였다. 2차대전 때 미국은 소련에 트럭 40만대 이상, 비행기와 장갑차 각각 1만대 이상, 군복 3천만벌 등 어마어마한 군수물자를 줬다. 미국은 소련(당시 러시아)이 1차대전 때처럼 갑자기 전선에서 이탈하는 악몽이 재연될까봐 아낌없이 지원했다. 스탈린은 붉은군대가 미국인들이 흘릴 피를 줄여주니까 고마울 것 없다는 투였다. 베트남전의 한국군은 미국이 준 무기로 무장했다. 최근 미국이 이슬람국가(IS)와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에 무기를 대준다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드 값 10억달러 요구는 이런 전례들과도 맞지 않기에 더 황당하다. 무기를 한국에 준 것도 아니고, 운용을 한국군이 하는 것도 아니고, 배치의 주목적이 한국인들을 보호하는 것도 아니다. 가구점 주인이 주문하지도 않은 중고 소파를 남의 집 거실에 들여놓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놀면서 집주인에게 돈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다. 야멸찬 장사치의 습성이 몸에 밴 트럼프가 개발한 새로운 무기 장사 방식이다.

시간을 다시 24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현문에 현답을 얻어낸 병사가 실제로 공포탄을 구걸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미군이 자기 목숨 지키는 데 써야 할 실탄을 줬을 리는 더구나 없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한 동맹을 무조건 추앙하는 타성이 황당한 청구서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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