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존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8년 1월, 이명박 정권 출범을 앞둔 인수위 시절이었다. 국정홍보처의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한 홍보처 간부가 했다는 이 말은 그 뒤 한국 공무원의 민낯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명언’으로 계속 회자돼 왔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공무원의 영혼은 더욱 남루해졌다. 공직사회의 영혼은 승진이나 자리 보전을 위한 저잣거리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권력은 끊임없이 공무원의 영혼을 감시하고, 영혼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공무원들은 가차없이 거리로 내몰았다.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다는 것은 공직에 대한 정체성의 부재를 뜻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공직사회 분위기를 돌아보면 ‘영혼의 부재’라는 말만으로 부족할 지경이다. 최고 권력자가 지닌 ‘사악한 영혼’은 공직사회 곳곳에 감염 현상을 일으켰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의 고해성소가 된 ‘블랙리스트 법정’이 이를 웅변한다. 온갖 억지와 편법으로 점철된 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보인 교육부 공무원들의 모습에서 공직자로서의 도리나 양심, 자라나는 세대를 위한 백년대계 등의 단어는 찾아볼 길이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난 정부에서 이뤄졌던 비정상적 국정 운영이 착착 정상화의 궤도로 접어들고 있다. 교육부는 중등 국정 역사교과서를 폐지하고 역사교과서 발행 체제를 검정제로 환원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교육부는 이를 “새 정부 출범 첫 교육정책”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정책 선회를 두고 한쪽에서는 “공무원은 역시 영혼이 없는 조직”이라고 비아냥댄다. 앞으로 각 부처의 정책 전환이 가속화할수록 그런 빈정거림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과연 정당한가. 사실 ‘정치적 책임성’과 ‘관료의 전문성’이라는 두 가치의 충돌은 학문적으로도 큰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관료의 명예는 상관의 명령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 것처럼 받아들여 그대로 수행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공무원이 영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료집단의 과도한 권력을 경계하는 말이었다. 행정과 정치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는 민의에 의해 선출된 권력 쪽에 우위를 두는 견해도 있고, 행정의 독립성과 전문성에 방점을 찍는 의견도 있다. 어느 쪽의 견해든 기본 전제는 정치와 행정 모두 민주주의, 공공성, 자율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비극은 상식과 정의,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마저 깡그리 무시한 권력이 행정을 장악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이 전문지식을 발휘해 공공성을 발휘할 기회는 원천봉쇄됐다. 따라서 정부 부처의 정책 선회나 공무원의 말 바꾸기를 형식적 차원에서만 접근해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령 새 정부 출범 뒤에도 교육부가 국정 교과서 강행 방침을 고수할 경우 이를 일관성과 흔들림 없는 소신으로 높이 평가할 것인가. 문제는 방향 전환의 내용이다. 선출된 권력의 뜻이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고, 공무원이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전문지식이나 소명의식, 건전한 도덕적 통찰력과 부합할 경우 방향 선회는 백번 환영해야 옳다. 그런데도 정책 전환을 무조건 공무원의 영혼 부재와 연관 지어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부추겨 마음에 들지 않는 권력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일 뿐이다. 최근 쟁점으로 등장한 4대강 사업 정책감사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이 2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과욕·졸속 사업’이라는 점은 감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 국가 예산의 낭비, 자원 배분의 왜곡과 편중 등에 대해 ‘영혼 있는 공무원’들이 느꼈을 아득한 절망감과 체념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감사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정책 수립 과정에서 특히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공무원 사회는 이제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영혼의 부재도, 사악한 영혼의 감염도 떨쳐버리고 ‘맑은 영혼’이 공직사회에 흘러넘쳐야 한다. 공직사회의 새로운 기풍은 공무원 개인의 각성과 결단 못지않게 권력 스스로의 노력이 수반돼야 가능하다. 공무원이 맑은 영혼을 가꿔나갈 수 있도록 시스템과 제도를 손보는 노력이 어우러져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이 나라가 새롭게 출발해 탄탄한 반석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연코 달성해야 할 과제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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