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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변화를 일으키는 공감능력 / 나효우

등록 2017-05-26 17:42수정 2017-05-26 22:24

나효우
착한여행 대표

오래전 일이다.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지난달 만난 스리랑카 농부 때문인 것 같다. 수년간 유기농을 고집했는데 이제는 마을 전체가 유기농을 하면서 마을살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변화의 속도보다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2004년 12월26일, 성탄절 다음날이었다. 나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강력한 지진으로 해일이 발생해 타이 푸껫을 휩쓸고 있다는 긴급 뉴스를 보았다. 지진 발생 지역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아체주 앞바다였다. 규모 9.3의 강진이었다. 급히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니 피해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후 사고 집계를 보니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17만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스리랑카, 인도, 타이 등에서 약 6만여명이 사망했다.

이듬해 피해복구가 한창인 아체를 갔다. 참혹한 현장이 끝도 없었다. 거대한 배가 지진해일에 밀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점령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 세계 각지에서 온 구호단체들의 수많은 텐트에 각종 깃발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저 수많은 구호단체 중 주민에게 기억되는 단체가 있을까. 주민들 입장에서 궁금했다.

현지 단체들의 도움으로 여러 마을 주민대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국가 또는 구호단체 이름과 이유를 물었다. 유명한 단체를 이야기할 거라 짐짓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체 이름을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이유가 흥미로웠다. 어느 날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 곳곳을 다니는 외국 여성이 있었는데, 여느 단체들처럼 구호물품을 들고 온 것도 아니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만 했다. 그리고 여느 구호단체와 달리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계속 묻기만 했고 주민들의 대답에 정말 기가 막힌 생각이라고 공감하는 게 전부였다.

주민들은 이제나저제나 언제 올지 모르는 구호물품을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뭘 해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날품팔이라도 좋으니 손수레와 옥수수를 공급해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답했다. 이쯤 되면 손수레를 공급해주겠다고 해야 할 텐데 “그 손수레와 옥수수는 어떻게 구입하지요?”라고 또 물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주민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쓰나미에 떠밀려온 폐자재 중에 골라서 고쳐 쓰면 될 것 같았다. 손수레 바퀴 짝이 안 맞는 것도 있지만 굴러가기만 하면 급한 대로 쓸 수 있었다. 그녀는 몇푼 안 드는 옥수수와 재료비는 장기 저리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공짜로 받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어서 그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게다가 돈 빌려주는데 까다로운 서류를 요구하지도 않고 주민들에게 맡긴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 후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폐자재 수리 전문가가 되고 이래저래 자그만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그녀는 빌려준 돈이나 사업보다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그제야 주민들도 어느 나라 어떤 단체에서 일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몇달이 지나서 알게 된 단체 이름은 영국의 ‘옥스팜’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주민들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옥스팜은 참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단체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변화의 속도보다 함께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정책 못지않게 사람이 중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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