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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이름 없는 곳들의 목록 / 피터 김용진

등록 2017-06-02 18:03수정 2017-06-02 21:26

피터 김용진
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뮤지션

평소 집안에만 있는 성격이 아니라 잠깐이라도 매일 어딘가에 다녀온다. 그렇게 조금씩 단골 포인트가 쌓이는 곳들이 생기고 있다. 나의 단골집은 대부분 이름 없는 곳이다. 이름이 없다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곳들. 포털에서 ‘경주여행’이라고 치면 꼭 등장하는 브런치 집이며 팬시한 식당들은 ‘노키즈존’으로 운영되거나 재료가 무섭게 소진되기 때문에 오히려 동네 사람이 들어가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가끔 경주로 찾아오는 친구나 지인들이 있는데 현지인의 추천을 원하기에 A4 한 장에 볼거리, 먹을거리, 숙소, 여행 팁 등을 내 단골집으로 채워 전해준다. 나의 목록을 모두가 만족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이 가는 곳을 꼭 가보길 원한다. 뭐, 효율적인 생각이기는 하다.

목록에 포함된 곳 중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은 내가 지금까지 경주에 살면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입장료도 주차비도 무료인데다 희귀 수목·야생화가 가득하고 보유 식물은 910종이나 된다. 수목원이 되려면 1000종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데, 12만평의 대지에 개울도 있고 산책로도 다양한 이곳은 여느 수목원 못지않다. 메타세쿼이아 숲이며 통나무 다리는 사진 찍기에 딱 좋다. 게다가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이라는 이름 덕분인지 언제나 한산하다.

불국사도 목록에 포함되었는데 바로 집 앞이라 다른 곳보다 자주 다녀오기 때문이다. 근처에는 검색해서는 찾을 수 없는 나의 멋진 단골 분식집과 꽃집카페가 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주차도 어렵고 가격도 비싼 곳에서 후다닥 식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무리 불국사 근처, 토함산 아래여도 고즈넉한 곳들이 있다.

나의 목록 중 우리집 근처 한옥민박은 심지어 간판도 없는 곳이다. 1년에 열 팀도 채 받지 않는데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게스트하우스 정도의 가격에 방 3개, 화장실 2개가 딸린, 툇마루가 넓은 한옥 독채를 마당까지 포함해 사용할 수 있다. 경주빵과 커피, 떡과 과일을 조식으로 준다.

가끔 추천지로 능은 빼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경주에 오지 않는 게 낫겠다는 농 비슷한 말을 한다. 부산 광안리에 가면서 ‘바닷가에 있는 건 빼고요’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사방이 능이다. 집 근처에도 능이 하나 있는데 ‘괘릉’이다. 이곳 역시 목록에 넣었다. 유명한 능도 아니고 다른 관광지와 가깝지 않아서 한적한 곳이다. 여기에는 외국인처럼 생긴 신라 석상이 있어 연구자들이 관심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는 주말이나 아이가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에 돗자리 들고 간다.

내비게이션은 빠른 길을 택할 뿐이다. 좀 돌아가더라도 운전하기 좋고 풍경이 좋다면 여행자에게는 그 길이 고운 길일 텐데, 빠른 길이 좋은 세상에서는 ‘이름 없는’ 곳들은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덕에 그런 길들은 여전히 한가롭다.

먹고 마시고 읽고 걷고 기타 치고 글을 쓴다. 옥수수도 키우고 아이도 키운다. 토함산의 모습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다. 바람이 다른 날보다 시원하다. ‘내 얼굴에 고갯마루의 바람이 불어왔다.’(<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산과 바람이 가까운 곳이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의 단골이 만들어진다.

나의 목록에 있는 곳들이 사라지지 않길. 산 너머 핵발전소들은 누군가의 목록에서 하나씩 지워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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