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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우리가 결정한다

등록 2017-06-04 18:15수정 2017-06-05 17:50

이승욱

외환위기가 덮쳤던 약 10년 전 쯤, 대기업, 금융권, 공기업들까지도 구조조정 명예퇴직의 태풍이 불었다. 명예퇴직을 권고받은 50대 중반 남성의 상담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직장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는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비록 퇴직을 권고 받았지만 자신은 버텨야겠다고 했다. 아직 자녀들 대학도 안 마쳤고, 중간에 주식 투자 잘못해서 한 재산 날리는 바람에 모아 놓은 돈도 없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분해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명예퇴직에 응하지 않았더니 아무 할 일도 없는 한직에 발령내고는 그림자 취급을 한다. 자신이 쏟아 부은 열정이 얼마인데, 어쨌건 이 회사에 자기의 정서적 지분이 조금이라도 있는데, 이렇게 대접할 수 있나 싶어서 버티고 있는 중이란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는 점점 비감해져 갔다. 아내와도 소원해 졌고, 아이들과 관계도 서먹한데 재산도 모아 둔게 별로 없다. 직장에서 마저 잘리고 나면 자기는 빈털터리라는 생각에 버티고 있음을 인정했다. 세상에 나가는 것도 두렵다. 현직에 있을 때는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는 일들도 종종 있었고, 명함 내밀면 어디가서 괄시는 안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계급장 다 떼고 자연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겁이 난다. 그런데 상담이 계속 진행되면서 뭔가 모르게 마음 깊이 삭혀지지 않는 분노가 느껴지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정해진 상담 회기가 두 번 쯤 남았을 때, 상담실에 들어와 앉자마자 그는 내게 말한다. “이 선생, 오늘 아침 눈뜨면서 문득 깨달았어요,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왜 내 인생을 지들이 결정합니까? 이건 내 인생인데!”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타인이 박탈했음을 안 것이다. 깊고 진한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된 그 남성은 그날 바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당장 수리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했다.

필자에게는 오랫동안 품어온 박탈감에 근거한 열등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세상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한 분함과 무력함 같은 것이다. 세상의 법과 제도는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의 이득에 따라 조작되고, 내가 사는 세상을 저들이 결정하는 것을 보면서 울분을 삭힌 적이 헤아릴 수 없었다. 부자들은 항상 더 좋은 자리를 선점했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항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미국의 사립대학에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새파랗게 젊은 그 자식들은 개선장군처럼 한국에 돌아와 부모들의 돈으로 외제차를 끌고 값비싼 호텔 레스토랑에서 비슷한 수준의 인간들과 같이 ‘디너’를 먹으며 무리를 만들고 연예인들과 별장에 가서 '파티'를 한다. 그런 천박한 것들이 결국 권력을 승계하고, 내가 사는 세상을 결정한다는 것이 분하고 굴욕스러웠다. 내가 아는 한, 많은 돈을 가졌고 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더 뜨겁고 천박한 욕망을 가졌다는 뜻이다. 욕망의 온도는 무지의 깊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 그들의 무지한 욕망이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을 수 없이 경험하면서, 무력감과 울분을 감당하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지난 겨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무력하지도 분하지도 않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29(1980년 5·18), 2016년 촛불혁명. 돌이켜 보니 세상은 우리가 결정하고 있었다. 30년을 단위로, 내 아버지가 이승만을 몰아냈고 내가 전두환을 쫓아냈고 내 아이들이 박근혜를 파면시켰다. 소소한 것은 너희들이 결정해라. 큰 것들은 우리가 결정한다. 삶은 결정하는 자가 주인이다.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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