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감독, 작가 일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한국에 여행 온 그를 만났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가볍게 만나 커피 한잔 하려던 우리는 계획을 바꿔 밥을 먹었다. 그는 어쩌다 영화를 만들게 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덟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갔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 투”라고 했다. 그는 중학교 때 학교를 자퇴하고 음악을 하다, 미국으로 가 영화를 공부했다고 했다. 흥미로웠다. 나는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았고, 그 역시 나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리턴 티켓이었다. 당장 이틀 후면 돌아가야 하는 당신을 두고 나는 이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고심했다. 우리는 다음날 다시 만나 데이트를 했고, 나는 동이 트자마자 비행기표를 사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그가 사는 도쿄가 아닌 후쿠오카였다. 연휴를 맞아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 그의 여정에 난데없이 사랑에 빠진 한국 여자가 등장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짐짓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절한 타이밍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의 가족과 함께하는 유후인 온천 여행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해피 뉴 이어!” 나는 그의 가족들과 건배를 하며 새해를 맞았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물세 살 때쯤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는 직업군인이었고 하루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내게 청혼을 했다. 나는 그가 좋았고, 그러자고 했다. 나는 부모에게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해 두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가 헤어지자고 했다.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모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이유를 물으니 “너의 부모가 장애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가 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애에 대한 편견과 싸워 왔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관계를 그만두자고 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부모를 만나 잘못된 생각이라고 알려주어야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가 “너와 아이를 낳으면 장애인이 태어날 확률이 높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최악이었다. 그러나 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그만두는 것은 신념에 맞지 않았다. 울고 또 울다 못해 악을 썼다. 그와 헤어지는 일은 그렇게도 어려웠다. 어느 날 엄마는 그와 왜 헤어졌는지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지. 보라도 그렇고, 보라의 부모님도 그렇고.” 이야기를 들은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내게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마 전, 그의 어머니가 도쿄로 출장을 오셨다. 어머니는 요새 한국 수어를 배우고 있는데 일본 수어와 많이 비슷하다며 주먹을 쥐고 검지와 엄지를 두 번 붙였다. “같다”라는 뜻의 한국 수어이자 일본 수어였다. 그의 어머니가 손을 움직여 수어를 한 순간,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디폴트값’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관계 맺음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데, 이거 하나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일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