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하러 제주도에 갔을 때다. 30여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자칭 ‘전직 간첩’ 어르신들과 같이 승합차에 타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쪽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당신 사정을 말한다. “오늘은 안 돼. 육지 사람들이 왔거든.” 그 말을 듣자 육지에서 온 객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은 왜 웃느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덩달아 웃었다. 육지 사람이란 합성어가 생소했다. 그리 호명되는 것도 첫 경험이다. 섬을 척도로 내 정체성은 육지 사람이 맞다. 일상에선 육지생활자가 기본값이니 섬 사람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 살았던 거다. 여자는 여성 장관이고 남자가 장관이듯 말이다. 이 육지 사람 에피소드를 제주에 사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조용히 부연한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육지 것들’이라고 부른다고. ‘군’ 소재지 강연을 얼마 전 처음 갔다. 충남 부여군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특강에서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작가님이 서울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만약 여기에 살았어도 그게 가능했을까요.” 낮고 느린 목소리, 수줍은 말투의 그녀가 어쩐지 울까 봐 나는 조마조마했고 급소를 찔린 듯 안절부절못했다. 원망도 질책도 애원도 없는 그 투명한 물음에는 지역에 깃든 청년의 실존적인 고민이 담겨 있었다. 서울 아닌 지역에서 오는 강의 제안 메일은 더 길다. ‘지방이라 오시라고 청하기 면구스럽습니다’ ‘교통편이 좋아졌는데도 죄송스럽네요’ 같은 문장들이 덧달렸다. 죄 없이 죄송해야 하는 지역의 언어에 나는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서울 사는 게 벼슬처럼 되어버린 현실에서 별다른 불편이 없으니 자각도 없었다. 서울 사람으로서 누리는 줄도 모르고 누리는 것들을 부여 학생의 물음이 일깨웠다. 나는 대답했다. 배산임수한 가옥에 사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한 평 고시원에 사는 사람에게 나오는 글이 있으니 그나마 글쓰기는 삶에 공평한 거 같다고. 물론 영화, 전시, 강연, 시설, 사람이 서울에 몰려 있고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서울은 기회의 땅이기에 욕망을 생산하는 공장이고 결핍을 가르치는 학교다. 좋아 뵈는 온갖 것을 좇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놓친다. 나는 ‘서울’에서 공부와 일에 몰두하던 시기에 나를 가장 많이 부정했다. 기혼, 출산, 고졸, 여자라는 콘크리트처럼 견고한 존재 조건이 숨 막혀 한숨지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음이 터져나올 때마다 글을 썼다고 고백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어르신도 청년 시절엔 섬이 갑갑했다. 제주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 유학’을 몹시도 꿈꾸었지만 가난 때문에 포기했고 돈 벌러 일본을 드나들다가 결국 간첩 누명까지 썼다.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그의 무죄를 증명한 건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동창과 이웃인 제주 사람들이었다. 팔순의 길목에서 생의 한 주기를 돌아보는 그는 서울 간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며 벗이 있는 고향에서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말씀에서 배웠다. 잘 산다는 건 내 일상을 오래 묵묵히 지켜본 사람을 갖는 거구나. 청춘의 몸은 질문을 낳는다. 1960년에 제주 청년이 그랬듯이 2017년에 부여 청년이 뒤척인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그나마 막막한 질문만이 숨길을 열어주고 살길로 인도한다. 근래 육지 것이자 서울 것으로 정체성을 받아안은 나는 질문의 말풍선 하나 띄운다. 육지-서울이라는 다수, 주류, 중심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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