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최순실 특종기를 담은 <최순실 게이트-기자들, 대통령을 끌어내리다>(한겨레 특별취재반, 돌베개)를 최근 읽으며 숨은 제보자들의 활약에 놀랐다. 동료 기자들의 활약상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 그렇게 고생했는지 미처 알지 못한 구석도 많았다), 고비고비 등장하는 의인들의 존재가 무척 새삼스러웠다. 책을 덮으며 국정농단을 파헤친 주역이 과연 언론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익명의 제보자 ‘홍길동’은 지난해 9월 최순실이 케이(K)스포츠재단 설립에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첫 보도가 나가자 <한겨레> ‘최찾사’(최순실을 찾는 사람들) 팀에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홍길동 이름으로 된 메일에는 청와대가 전경련을 통해 미르재단을 급조하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확인 취재를 거쳐 곧바로 기사화했다. “공직 연관 조직”에서 일한다는 홍길동은 그 뒤에도 두어 차례 중요한 제보를 해왔지만 끝내 신원을 드러내진 않았다. 최찾사는 언젠가 홍길동과 만나 소주 한잔 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최찾사에는 대기업 문건이 하나 전달됐다. 대기업 본부에서 각 계열사 임원들에게 보낸 것으로, 미르재단 설립을 청와대가 주도했다는 점이 명기돼 있다. 당시 청와대와 전경련은 기업들한테 관련 문건들을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했는데 익명의 대기업 임원은 문건 하나를 몰래 숨겨 <한겨레>에 전달했다. 게이트의 변곡점이 됐던 정유라의 이화여대 특혜 보도는 이름 모를 이대생들에게 빚진 바 크다. 이들은 서로를 ‘벗’이라 부르고,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진 않지만 제보하고 행동하며 그들만의 ‘느린 민주주의’를 가꾸었다. 이른바 ‘이름없는 벗’들이다. 건물 관리인 노광일씨는 너무도 드라마틱한 역사의 의인이다. ‘더블루케이’ 사무실 건물 관리인이었던 노씨는 <제이티비시>(JTBC) 기자가 찾아오자 사무실 문을 따주고 고영태 책상에서 발견된 태블릿피시를 가져가도록 도왔다. 노사모 초기 회원인 노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하늘에 계신 노짱님(노무현 대통령)이 이걸 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친 주역은 언론이 아니라 이름없는 벗들, 곧 시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숨은 의인들이 각자 살아가는 현장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개인들에겐 결코 쉽지 않은 용기였을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게이트의 종착역이 어디였을지 알 수 없다. 언론이 물꼬를 트고 엮어갔지만, 게이트의 고비를 잇고 정점으로 끌어올려 박근혜를 쫓아낸 주역은 건물 관리인 노씨나 이화여대의 벗들과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역사는 우연을 통해 필연을 관철한다는 말이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농단이 극에 달해 정권은 임기도 채우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홍길동의 전자우편 같은 한 조각 우연들이 쌓여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정의가 이뤄졌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때론 더디더라도 역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도 불의에 맞설 태세를 갖춘 이름없는 벗들이 아주 많다. 권력 쥔 사람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더 겸허하고 더 정직해져야 한다. 촛불 이후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권력의 범주는 크게 확대되고 있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촛불은 때론 너무 거세게 타오르기도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 새 세상을 열곤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에는 예외가 없다. 우여곡절이 있지만, 역사를 앞으로 밀어젖히는 이들은 항상 이름없는 벗들이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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