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지난달 말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준비 기간이 짧았던 점을 고려하면 후한 점수를 줄 만하다. 올해 초 우리 정부의 부재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군사행동 가능성에 가슴 졸이며 아파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괜스레 들뜨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미 정상회담 준비 과정을 복기해보면 왠지 아쉬움이 남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체계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적 여론과 미국의 공세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지금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지렛대로 쓸 수 있는 여지를 거의 잃어버린 듯하다. 문 대통령의 개인사와 접목시킨 ‘장진호 스토리’는 분명히 감동적이었고 전술적으로 훌륭했지만, 다소 과하게 부각시킨 감도 없지 않다. 이런 수고로움과 노력에도 아마 미국 조야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경계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내 보수 여론도 ‘한-미 동맹 균열’이라는 무기로 문재인 정부를 흔들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하루 이틀 된 얘기도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대비해야 한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한국의 진보진영도 미국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다져야 한다. 외연을 확장해 미국 내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제국은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이다. 야만은 상수다. 그것이 제국을 싫어하는 근거는 될 수 있어도 회피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특히 ‘미국 우선주의’라는 이름 아래 야만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트럼프 행정부에선 야만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현실적으로는 한반도 긴장 완화와 북핵 문제 해결 담론의 단초 마련을 위해서도 진보진영의 좀더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대미 대응이 필요하다. 미국을 움직이지 못하면 북한을 움직이지 못한다. 북한을 움직이지 못하면 미국을 움직일 수 없다. 전략과 목표가 훌륭해도 관철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당장은 진보진영의 많은 북한·외교 민간 전문가들이 ‘벌떼같이’ 워싱턴으로 왔으면 좋겠다. 미국의 대북 강경파 전문가들과도 마주 앉아 토론하고 얼굴을 붉힐 정도로 논쟁해도 나쁘지 않다. 세미나에 초청하지 않으면 작은 세미나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장기적으로는 워싱턴에 진보진영 자체의 상설 거점을 세우는 방안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겠다. 정부 산하기관은 정권이 바뀌면 논리를 바꿀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시적 소통의 창구가 될 수 있는 안정적인 틀이 필요하다. 형태는 싱크탱크가 될 수도 있고, 한국 싱크탱크의 워싱턴 분소가 될 수도 있다.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면 정치행동위원회(PAC·팩) 형태도 고민해볼 수 있다. 물론 진보진영 안에서도 뛰어난 대미 네트워크를 가진 민간 전문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채널을 좀더 다양화해야 하고, 미국 내 대북 강경파와 실용파를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접촉면이 넓어져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은 한국의 진보와 보수 쪽 전문가들을 두루 만나며 정세 파악을 시도하지 않는가. 미국 행정부나 싱크탱크, 의회에서 나오는 자료만으로는 저간에 흐르는 흐름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진보진영의 튼튼한 자체 대미 채널이 없으면 집권 뒤 공식적인 외교 채널에만 의존하게 된다. ‘크로스 체크’가 불가능해진다.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다가 ‘직업 외교관들을 못 믿겠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그쯤 되면 수습하기 힘든 상황으로 진입한 것이다. 진보진영이 집권하면 불리한 여론과 상황 속에서 한-미 관계에 대처해야 했다. 이제 공세적으로 인적·물자 투자를 해보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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