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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생리대 집단소송에 참여하며 / 김영희

등록 2017-08-31 17:24수정 2017-08-31 20:58

김영희
논설위원

“그걸 누가 읽어. 핸드폰으로 찍어 확대해야지.”

화장품 뒤에 붙은 제품 설명이 보이느냐는 내 질문에 선배 한 명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1~2년 전부터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 어른거림이 심해졌다. 신문용·컴퓨터용 돋보기를 따로 맞췄다는 또래 타사 여기자는 화가 나 카드를 확 긁어 수십만원짜리 안경테를 샀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로하고픈 마음, 충분히 공감 갔다. 여성 나이 40대 중후반, 갱년기를 걱정할 때다.

릴리안 생리대를 상당 기간 썼다. ‘1+1 행사’를 많이 해 20·30대 구매 비율이 높다지만, 나이 들었다고 다 비싼 것만 사진 않는다. 마트 행사 때 처음 구입했는데, 파우더향 제품의 드라이한 착용감이 깨끗하게 느껴졌다.

아직 생리대에서 검출됐다는 화학물질의 인체 위해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때로 다른 제품을 섞어 써왔기에 내 증상이 이 생리대 탓인지 단정 지을 수도 없다. 하지만 여성환경연대가 이틀간 접수된 피해 사례 3009건을 분석한 증상을 보니 세 가지가 나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 제품을 주로 쓰던 때 유독 심했다. 여성질환으로 병원도 간 적 있다. 밤늦은 퇴근이 일상인데다 노안까지 왔던 터라 이른 폐경인가보다 싶어 우울했다. 주변 남성들이 아내들의 ‘분노 증후군’을 얘기하며 “여성 갱년기가 아이 중2병보다 무섭다”고 할 때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노안이라면 주변에 말이나 하지, 어디 털어놓기도 힘든 문제다. 인터넷엔 ‘폐경인 줄 알았다’는 40대 여성들 호소가 적잖다. 젊은 여성이라고 달랐겠는가. 여성질환을 얘기하면 흔히 다이어트, 꽉 끼는 옷, 스트레스 탓 한다. 틀린 말 아니다. 하지만 그 탓에 여성들은 오롯이 ‘자기 탓’만 했을 것이다. “환불 안 받아도 좋고, 소송 안 이겨도 상관없다. 대신에 이전 내 몸으로 돌려놨으면 좋겠다”는 한 게시글이 어디에 분노를 터뜨려야 할지도 모르는 여성들의 답답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지난 24일 오전 서울 중구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시민단체 ‘여성환경연대’가 일회용 생리대 부작용 규명과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24일 오전 서울 중구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시민단체 ‘여성환경연대’가 일회용 생리대 부작용 규명과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얼마 전 난생처음 집단소송이라는 데 참여 신청을 했다. 무엇보다 ‘힘들고 나이 든 탓’만 했던 자신에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앞으로 사용할 시간이 길진 않지만, 생리대에 대해 ‘알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 여성 소비자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기도 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인 미국 의학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폐경기가 “호르몬 변화로 획기적인 정신적 재편성이 이뤄지는 시기”라며 이 급작스러운 대변혁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를 말한다. “가임기 동안 사회적·문화적 성차별에 지속적으로 대항함으로써 폐경기를 앞둔 중년에 급작스럽게 찾아올 변화에 대한 욕구를 일찍부터 실행에 옮기는 것.”

1972년 국내산 생리대 시판은 한국 여성의 삶을 바꾼 주요 변화 중 하나로 꼽힌다. 외국산 유기농제품이나 면제품이 불티난다지만, 솔직히 난 50년 전 세대처럼 살 자신도 생각도 없다. 지난 7년간 생리대의 가격상승률은 소비자물가의 2배. 신제품이라는 이름 아래 그동안 첨가된 물질이 오죽 많을까 싶다. 그런데 정부의 품질검사 항목 기준은 20년 전 그대로다. 제품 수거 검사는 2000년대 중반에야 시작됐고 화장품에는 깨알 같은 크기로나마 있는 전 성분 표기제도 도입되지 않았다.

피해 사례 접수나 역학조사 요구엔 답이 없던 식품의약품안전처가 30일 여성환경연대와 강원대 연구팀 조사의 과학적 신뢰도가 낮다고 했는데, 이번 사태의 본질을 알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최소한 여성이 자신의 건강에 직결된 제품의 정보를 제공받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지 않는가. ‘나를 역학조사하라’고 나서고 싶은 심정이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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