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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이 여중생들을 보라 / 은유

등록 2017-09-08 17:40수정 2017-09-08 20:52

은유
작가

매 맞지 않고 성폭력 당하지 않고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십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슬픔에 잠이 깰 때마다 새벽녘 시를 썼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처럼/ 그렇게 때렸으면서// 당신은 뭐가 그렇게 급했기에/ 이토록 빨리 나를 내려두고//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멀리 가버렸나요.’ 이 3연짜리 시의 제목은 ‘가족’이다. 나를 죽인 건 당신들인데 왜 난 당신들을 그리워하고 있나요, 라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관한 시를 쓰고 ‘무서운 나의 집’이라는 글도 남겼다.

내 몸엔 보라, 파랑, 빨간색 멍이 얼룩덜룩 있었고 전신거울로 그걸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다고, 여름에도 긴팔에 긴바지를 입었으며 친구들 입는 핫팬츠를 못 입고 멋을 내지 못해 억울하다고 그 옆의 여자아이는 썼다. 한 사람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상처, 아니 피와 멍의 양과 부피를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눈앞에서 자꾸만 물방울처럼 흩어지는 글자들을 문장으로 모아서 읽느라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떻게 얼마나 언제까지 아팠을지 알 수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부산 여중생 폭력 사건의 사진을 봤을 때, 그 얼굴들이 겹쳐 보였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자아이들. 중학생 때부터 시작되는 몸의 수난들. 그들이 쓴 증언의 단서들로 서투르게 그려보았던 참혹한 장면들. 제아무리 상상력과 공감력을 동원해도 문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완강한 현실들. 부산 여중생은 또래 집단에 의해 일어난 학교 밖 폭력이고, 내가 만난 아이들은 부모에게 당한 가정 내 폭력이지만 공권력이 작동하지 못하는 사적 공간에서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저 지경으로 맞는 여중생이 저게 다가 아니다. 부산을 기점으로 강릉, 대전 등 전국으로 산불처럼 번지는 여중생 폭력 사건의 경쟁적 보도와 네티즌의 공분 기류에 편승해 일러바치고 싶다. 당신의 옆집에서 아침이면 말짱하게 양복 입고 출근하는 아빠에게 맞는 그 또래 아이들이 있다고. 남이 아닌 혈육이라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정을 이용해 폭력을 저지르는 어른 가해자는 어떻게 색출하고 처벌하면 좋겠는지 조언을 구하고 싶다.

여중생 가해자가 저지른 ‘조폭 수준’의 잔혹함은 놀랍다. 그러나 대학, 군대, 직장, 집 등을 무대로 어른들이 펼치는 은밀하고 무자비한 조폭 수준의 폭력 사건, 그 연장선에서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해 여중생을 감옥에 영구 격리 시키자는 엄벌주의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청소년을 봐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폭력을 봐주면 안 된다.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폭력의 총량을 인식하는 게 우선이다. 사적 공간에서 겪은 폭력을 공적 장에서 떠들고 각각의 폭력 경험을 연결해야 한다. 부산 여중생 피해자가 있기 전에, 이미지의 스펙터클로 전시되지 않았다 뿐,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 피해자도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저 나이에 난 얼마나 맞고 살았는데…, 부러워요.” 몸의 피멍을 시어로 빼내는 저 아이는 피해여성 쉼터에 있는 여중생을 보며 집에서 좀 더 일찍 탈출하지 못한 제 처지를 통탄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은 자’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를 실천하고 있다. 교사들을 만날 때마다 아이들 안색과 몸을 잘 살펴달라고, 가정폭력·성폭력 당하는 아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을 연계해주라고 신신당부한다. 피해자의 몸-말에 집중할 때 그나마 가해자의 악을 최소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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