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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20년 전 이회창처럼

등록 2017-10-11 18:30수정 2017-10-11 19:43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1998년 8월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총재가 대선 패배 8개월 만에 정치 일선에 복귀한 건 당시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전까지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는 정치를 그만두거나, 설령 재개하더라도 오랜 칩거와 고민의 시간을 거친 뒤에야 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대통령에 도전하는 건 그만큼 정치적으로 무거운 행위였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대선 막판에 이회창 후보를 도와주고 2년의 총재직을 보장받은 조순이 이끌고 있었다. 정치적 도리에서나 조순과의 의리에서나 이회창의 조기 복귀 명분은 약했다.

결국 이회창은 8월 전당대회에서 승리해 총재로 복귀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정치 은퇴도 생각했으나, 당의 재건과 수습이 필요한 판에 이를 팽개치는 건 무책임한 처사라 생각했다”고 썼다. 그러나 사실은 차기 대선을 위해선 빨리 당내 세력을 구축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선택은 옳은 것처럼 보였지만, 독이 됐다. 김대중 정권 4년간 그는 ‘제왕적 야당 총재’로 막강한 권한을 누렸지만 2002년 12월 대선에선 또다시 패했다. 5년 전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복됐던 탓이다. 이회창의 두번째 실패는 아무런 변화 없이 서둘러 정치로 돌아온 8·31 전당대회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20년 전 일을 다시 떠올리는 건, 최근 정치 상황이 이회창 총재의 정치 복귀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 직전에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11월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두 쪽으로 갈라질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유 의원이 전당대회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그렇게 짜인 2017년 말의 한국 정치 지형은 암울하다.

지난 대선에서 2, 3위를 했던 홍준표, 안철수 후보는 이미 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해 ‘성공적으로’ 정치 무대에 돌아왔다. 유승민까지 복귀하면 5·9 대선에 나섰던 4명의 주요 후보가 불과 6개월 만에 ‘대통령과 세 야당 대표’로 다시 정치적 대결을 시작하는 셈이다.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들 눈엔 선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세 야당 정치인은 대선에서 국민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와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새 정권을 향한 날선 비판과 ‘당이 위기에 처했는데 외면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을 뿐이다.

20년 전의 이회창 총재처럼, 세 후보가 얻으려는 건 강력한 당 장악이다. 차기 대선을 위해선 ‘홍준표당’ ‘안철수당’ ‘유승민당’을 만드는 게 필수라고 보는 것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최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어느 기자를 지목하며 ‘내년에 수성구청장에 도전하라’고 세차례나 공개적으로 말한 일이 당내에서 화제가 됐다. 홍 대표가 지방선거에서 대표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자기 사람을 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당화’라는 말이 요즘 당내에 부쩍 많이 나도는 건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방선거 공천권을 쥐고 그걸 기반으로 대선 재도전의 발판을 굳힌다는 생각, 이것이 홍준표와 안철수, 유승민의 때이른 정치 복귀를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란 미래를 말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안철수 대표는 “과거에 집중하면 다가올 미래의 개혁을 볼 수 없다”고 현 정권의 ‘적폐 청산’을 비판했다. ‘적폐 청산’이란 단어가 미래와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현 정권을 두고 ‘왜 자꾸 과거를 들춰내느냐’고 타박하는 야당 주장 또한 국민에게 먹혀들긴 어렵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부시에게 아깝게 진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4년 뒤 대선에 재도전하라는 지지자들 요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시 대통령과 다시 맞붙으면 선거 초점은 미래가 아닌 과거로 되돌려질 게 분명하다.” 우리 국민도 대통령과 세 야당 대표를 보면서 지나간 대선을 자꾸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유리한 듯 보이나, 길게 보면 결코 좋을 게 없다. 현 정치 구도는 손쉽게 대선 시기로 되돌아가 그때의 이슈와 쟁점으로 대결하는 쪽으로 자꾸 대통령을 이끌기 쉽다. 한번 판가름난 승패는 쉽게 뒤바뀔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문재인 정권에 대한 평가는 대선 후보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집권 이후 어떤 정책으로 어떤 성과를 냈고 어떻게 국민을 설득했는지에 달려 있다. 야당이 과거에 머문다고 집권세력마저 과거로 돌아가선 안 된다. 앞으로 나가자고, 먼저 말해야 한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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