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논설위원
피에르 부르디외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말을 경제 영역을 넘어 사회·문화 영역으로 확장한 사람이다. 부르디외가 유행시킨 자본 개념 중 잘 알려진 것이 ‘상징자본’이다. 전문 지식이나 작품 활동으로 쌓은 명성이 상징자본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상징자본은 잘 활용하면 사회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상징자본 선용의 고전적인 사례는 ‘지식인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식인은 계몽주의 등장과 함께 태어났다. 볼테르·디드로·루소 같은 이 시기 지식인들은 학식과 필력으로 획득한 상징자본을 사회변혁에 돌렸다.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은 계몽지식인의 뒤를 잇는 현대적 지식인의 출현을 알렸다. ‘나는 고발한다’를 쓴 소설가 에밀 졸라는 자기 분야에서 획득한 명성을 사회적 불의를 규탄하는 데 쏟아부음으로써 지식인의 표상이 됐다. 이후 지식인의 앙가주망은 프랑스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알제리 해방 전쟁을 지원한 장폴 사르트르가 그런 지식인의 대표자이며, 사르트르의 바통을 이어받은 미셸 푸코는 교도소 개혁 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사르트르와 푸코의 영향을 받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거리에서 돌을 던지는 사이드의 사진은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보여주는 상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지식인의 무기는 역시 돌이 아니라 글이다. 최근 소설가 한강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이 긴 반향을 일으켰다. 한강은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글로 한반도에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미국의 독자들에게 나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음으로써 얻은 국제적 명성을 반전과 평화를 호소하는 데 쓴 것은 상징자본 선용의 적실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경제적 자본이 순환과정에서 도태될 수 있듯이 상징자본도 순환과정에서 도태될 수 있다. 명성이 악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또 유형·무형의 탄압이 뒤따를 수도 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지식인들은 상징자본을 축적했더라도 쉽게 그것을 사회를 향해 던지지 못한다. 한강의 기고 행위가 그런 위험을 수반한 것임을 국내 수구보수 세력의 반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구세력은 한강이 한국전쟁을 ‘강대국들의 대리전’이라고 묘사한 대목을 꼬투리로 잡아 기고문 전체를 부정하려고 한다. 한국전쟁이 냉전 구도 속에서 동족 간 내전으로 시작해 강대국들 간 국제전으로 비화했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인데도 이런 진실은 외면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에 대한 상투적인 비난 하나를 인용한다. “지식인이란 자들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라는 비난이다. 이런 비난은 작가 한강의 경우에도 그대로 되풀이됐다. 소설가가 소설이나 쓸 일이지 쓸데없는 일에 나댄다는 타박이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지식인에 대한 이런 비난이 진실을 담고 있다며 이 비난을 그대로 수용한다.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고 누가 강요하지 않는데도 휴머니즘과 사회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일에 관여하는 사람이 지식인인 것이다. 창작에만 몰두해도 될 사람이 저 먼 나라의 일간지에 글을 보내 초강대국의 경거망동을 비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식인다운 행동이다. 더구나 한반도의 평화는 작가 자신을 포함해 이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안위와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하게 더 열정적으로 평화를 지키는 일에 상징자본을 써야 한다. 그것이 지금 필요한 명성 사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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