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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자꾸 학원에 빠지는 아이에게 / 은유

등록 2017-11-10 17:54수정 2017-11-10 19:34

은유
작가

십대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읽기, 더 싫어하는 건 쓰기, 더더 싫어하는 건 읽고 쓰기라는 담당교사의 얘기를 듣고, 왜 아니겠나 싶었다. 아이란 어른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존재지.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어른이 드문 환경에서 아이가 자기 생각을 만들긴 어렵겠지. 한글만 떼면 매일매일 부과되는 학습량을 잠자코 해내다가 스스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활동이 주어지면 얼마나 어색할까 짐작해본다. 우물에서 숭늉 만들기는 누구나 힘든 법이니까.

그래서 사실 좀 미안했어. 종이 한장 주고 30분 동안 글 쓰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나는 자신 없거든. 그런데 너희는 써냈어! 어떤 녀석은 문자메시지 치듯 일분 만에 서너줄을 쓰고, 다른 아이들도 대여섯줄 쓰고 노닥거리는데, 그 어수선한 와중에도 너는 미동도 않고 지면을 메우더구나. 내용은 이랬어.

‘중3 이후 학원을 ‘땡땡이’치는 습관이 들었고 학원을 스무번도 끊었다 다녔다를 반복했다. 부모님은 혼내면서도 계속 새로운 학원을 알아봤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학원 빠지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고1 기말고사를 치르고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었고 대학 진학의 목표를 세웠지만 공부 습관이 안 들어서 학원에 앉아 있는 건 힘들었다. 왜인지 학원 빠지고 노는 건 꿀맛이라, 자꾸만 빠지게 됐다. 그 사실을 안 엄마에게 장문의 문자가 오면 면목 없고 나도 월 백만원이 넘는 돈이랑 쓰다 만 교재가 너무 아깝다.’

글이 하도 생생해서 나는 학원비 결제하는 엄마 입장이 되어 속이 타들어갔다가, 학원 건물 앞을 배회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떡볶이집을 향하는 아이가 되어 초조했다가 갈팡질팡 울고 싶었다. 맞아. 고백할게. 아마 길에서 학원 빠지고 피시방 다니고 담배 뻑뻑 피우는 교복 입은 학생을 봤으면 한숨부터 나왔을 거야. 근데 네 글을 읽고서 알았네. 당사자도 죄책감과 갑갑함에 옥죄는구나, 땡땡이는 의지가 아닌 습관이 하는 일이구나, 공부가 하고 싶구나,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은 있지만 방도를 몰라서 그렇구나.

참 부조리한 상황이다. 한 아이가 정규교육 과정을 착실히 밟아왔어. 부모는 아침마다 아이를 깨워 밥 먹여 등교시키고 등골 휘도록 돈 벌어 등록금 대고 학원비까지 냈지. 근데 그 아이는 필요한 학습 지원을 받지 못한다니 말이야. 아이들 삶을 돌보는 정책이 아닌 오직 수능 대책이 ‘교육 정책’이 되어버린 세태를 아프게 실감한다. 내 아이만 피해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또 뭘 어찌할지 모른다는 핑계로 나도 외면한 현실인데 네 고민을 듣고 보니 부끄럽더라.

누가 네 처지에 맞는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혹여라도 “생각 없는 놈” “글러먹은 놈” “담배 피우는 놈”이란 어른들 말이 너를 설명하는 말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라. 공부에 흥미를 잃고, 학원에 빠지고, 담배에서 위로를 찾는 건 같은 원인의 다른 현상이다. 네겐 이런 면모도 있어. “자기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자신이 하는 행동이 남에게 어떤 (부정적) 영향을 주는지 적어도 파악하는 사람”이야. 자기 위치와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의 지표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

네가 대학 진학의 목표를 이루든 아니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날 보여준 모습처럼, 자기를 설명할 언어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아픔과 갈등을 표현하면 거기서부터 나은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날 너희들과의 만남을 흡연 예방 교육이 아닌 서로의 삶의 건강을 돌보는 자리로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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