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뮤지션 내 세대는 중학교 1학년에 ‘공식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 가장 큰 변화는 영어수업이 있다는 거였다. 영어 노래를 한곡씩 가르쳐주시던 선생님 덕분에 영어수업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지만, 꽤 오래 ‘다른 언어’가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언어의 차이에 대해 처음으로 반짝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노토리어스’(notorious, 악명 높은)라는 단어를 배울 때였다. ‘유명한’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뉘앙스가 ‘나쁜 것으로 잘 알려진’이어서 ‘악명 높은’이라 해석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때 비로소 다른 언어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어쩌면 ‘악명 높은’이라는 말 자체가 나에게 너무 낯선 단어라 그랬을지도. 오늘은 동네 자랑을 해보려 한다. 우리 동네에는 ‘유명한’ 것들이 많다. 수학여행, 벚꽃, 단풍,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황리단길 등으로 기억되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경주에서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시선으로 우리 동네를 마주하게 했고, 또 다른 유명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동네를 대표하는 사람이 유명하다. 2009년, 6명의 희생자를 내고 과잉진압으로 비판을 받았던, ‘용산참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 출신. 작년 20대 총선 때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당선되었다. 재판에서 철거민들의 변호를 맡은 것으로 ‘유명한’(famous) 권영국 변호사가 대항마로 출마했지만 3위에 그쳤다. 겉모습은 ‘용산참사’의 두 유명인이 경주에서 불꽃 튀기며 경쟁하는 모습 같았지만 현실은 맥 빠지는 대결이었다. 동네 분위기는 사뭇 다른 방향의 유명함의 승부. 권 후보는 ‘전과자가 무슨 정치를?’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전과가 80년대 노조 설립 과정에서 징역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핵발전소. 이곳은 세계 최대의 핵발전소 밀집지역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산 너머에는 월성 1~4호기, 신월성 1·2호기, 이렇게 6개의 핵발전소가 가동되고 있고, 해변을 따라 쭉 남쪽으로 내려가면 신고리 5·6호기를 포함한 고리원전이 9개, 모두 15개의 핵발전소가 있다. 핵발전소가 15개라니, ‘유명할 만’(notorious)도 하다. 감포의 아름다운 해변이나 동해안을 따라 포항까지 달리는 길에 만나는 대왕암, 그리고 근처에 고즈넉하게 서 있는 감은사지까지. 이제 그 이야기는 뒤로 밀리고 핵발전소, 그리고 지진이 경주와 포항을 유명하게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유명세로 급부상하고 있는 동네 기업이 있다. 자동차 시트, 시트 프레임 등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2015년 기준 총매출액은 2조1300억원. 본사가 경주에 있고 전세계 13개의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매출액 중 절반 이상은 현대자동차에 대한 납품 거래에서 발생한다. 회사 소개만 들으면 입사하고 싶은, 건실한 기업이다. 회사의 이름은 ‘다스’(DAS). 최근 실소유주 논란으로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항만으로도 영화 한편이 만들어질 정도이니, 앞으로 이야기가 더 펼쳐지면 우리 동네는 ‘다스의 고향’으로 또 유명세를 타겠지. 가끔 놀러 오는 친구들과 동네 한바퀴를 돌다 보면 회사 간판을 보고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요즘 나는 우스갯소리로 우리 동네의 세가지 자랑이라며 이 셋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야말로 노토리어스, 이런 씁쓸한 자랑거리가 아닌, 정말로 유명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순간이 올까. 자랑스러운 대표, 모두가 안전한 도시, 그리고 미담 가득한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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