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이택 칼럼] 웬만한 법으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록 2017-12-04 17:28수정 2017-12-06 14:49

김이택
논설위원

비행기로 귀국한 야당 ㄱ의원이 공항에서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호텔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밀회를 즐겼다. 국회 발언으로 대통령 역린을 건드린 일 때문에 그물 쳐놓고 기다리던 ‘그들’에게 그대로 걸려들었다. 공항에서부터 도청하고, 호텔방에 설치한 카메라로 물증까지 확보했다. 아내의 불륜을 믿지 않던 남편에게 음성과 영상까지 틀어주며 고소장을 받아내 결국 ㄱ의원을 간통 혐의로 구속한 배후에도 그들이 있었다. 1982년의 일이다.

자기들은 안보와 국익을 위해 일한다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권 안보’가 우선이었다. 1967년 대통령선거 당일엔 “만약 당선되면 쏘라”며 야당 후보 윤보선의 집 맞은편 여고 2층 건물에 저격수를 배치했다. 1971년 대선에서 90여만표 차이로 박정희를 위협한 김대중을 2년 뒤 납치해 살해 협박한 것도 그들이었다.

참여정부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를 설치해 40년간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탈탈 털다시피 했다. 2007년 10월 진실위 보고서를 내면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정권이 아니라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간첩 조작’ ‘선거 개입’ 같은 짓은 못할 거라고 다들 믿었다.

국민이 속았다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댓글공작을 시작으로 9년간 벌여온 나쁜 짓들이 물 빠진 갯벌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음지’의 나쁜 전통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00명 정도…한달이면 열번”(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행사를 했지만 여성들에게 건넨 사례비 역시 ‘그들’이 댔다. 40년 뒤 그의 딸도 그들의 특수활동비에서 40억원가량을 가져다 ‘사적 용도’에 썼다. 아버지 때 일들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먼저 요청했을 것이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정치자금을 넣어두고 사위에게 관리를 맡겼던 이후락 정보부장은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40년 뒤 후임자 역시 아내의 사교모임에 안가를 내주고 인테리어 비용으로만 10억원을 썼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진실위를 꾸렸다면서도 그들은 결국 불법사찰·공작을 부활시켰다. 정부에 비판적인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인, 학자는 물론 정부여당 인사까지 뒤를 캤다. ‘대통령 지키는 게 곧 국가안보’라고 합리화했다.

시대착오적인 ‘종북’ 논리도 다시 꺼냈다. 헌법대로 민주주의 지키라는 정당·단체·시민을 멋대로 ‘좌파’로 단정하고 ‘좌파=친북=적’이라는 냉전시대 색깔론을 앞세웠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나 방송계 ‘좌파 퇴출 시나리오’ 만든 것도, 우익단체와 대기업 엮어주는 신종 화이트리스트 활용법을 개발한 것도 그들이다. 온라인시대에 맞춰 관제 인터넷언론을 세우고 3천여명 댓글부대도 굴렸다. 다 ‘국가안보’를 위한다며 한 일이다.

그들 스스로 대수술을 청하며 법 개정안을 내놨다. ‘국외’ ‘북한’ 정보만 수집하고 대공수사권까지 넘기겠다니 지금까지 나온 가장 획기적인 개정안이다. 그런데 대안도 없이 불쑥 내놓는 바람에 “간첩은 누가 잡느냐”는 반론을 불러왔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모양새다. 얼마나 의지가 실렸는지 의구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숱한 조작·불법·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금씩 법을 손봤지만 국민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느낀다.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 수사권도 한때 폐지해봤고, 부당한 명령은 안 따라도 된다고 거부권도 신설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법 전문가인 파견검사들까지 불법인 줄 알면서 가짜 사무실로 동료 검사를 속이는 일에 가담할 정도면 분위기를 알 만하다.

35년 전 호텔방에 카메라 설치하듯이 정권에 밉보인 검찰총장의 혼외자 신상정보를 뒤졌던 그들이다. 그래 놓고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은 정보”라는 등 황당한 변명에도 동료나 상관 할 것 없이 수십명이 일제히 입 닫고 동조해줬다. 적폐청산 한다면서도 메인서버는 자기들이 꼭 끌어안고 있는 조직이다. 조직과 권한을 대폭 수술하는 특단의 대책이 아니고는 나쁜 버릇을 고치기 어렵다.

법을 제대로 손보지 않고 대통령이나 정보기관장의 선의에 국가안보, 국민인권을 내맡기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모처럼 내놓은 개정안대로 크게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웬만한 법으로는 그들의 불법을 막을 수도 없다. 10년 전처럼 속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ri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셋째는 아들이겠네” 당황스러운 점사가 맞았다 1.

“셋째는 아들이겠네” 당황스러운 점사가 맞았다

‘자폭 기자회견’ 이후 윤석열-한동훈 움직임 [11월11일 뉴스뷰리핑] 2.

‘자폭 기자회견’ 이후 윤석열-한동훈 움직임 [11월11일 뉴스뷰리핑]

‘파우치 사장’의 쓸모 [저널리즘책무실] 3.

‘파우치 사장’의 쓸모 [저널리즘책무실]

훈장을 거부한 이유 [왜냐면] 4.

훈장을 거부한 이유 [왜냐면]

안방 무대 못 찾은 K뮤지컬의 곤혹 [뉴스룸에서] 5.

안방 무대 못 찾은 K뮤지컬의 곤혹 [뉴스룸에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