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비행기로 귀국한 야당 ㄱ의원이 공항에서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호텔에서 만난 두 사람은 밀회를 즐겼다. 국회 발언으로 대통령 역린을 건드린 일 때문에 그물 쳐놓고 기다리던 ‘그들’에게 그대로 걸려들었다. 공항에서부터 도청하고, 호텔방에 설치한 카메라로 물증까지 확보했다. 아내의 불륜을 믿지 않던 남편에게 음성과 영상까지 틀어주며 고소장을 받아내 결국 ㄱ의원을 간통 혐의로 구속한 배후에도 그들이 있었다. 1982년의 일이다. 자기들은 안보와 국익을 위해 일한다지만 태어날 때부터 ‘정권 안보’가 우선이었다. 1967년 대통령선거 당일엔 “만약 당선되면 쏘라”며 야당 후보 윤보선의 집 맞은편 여고 2층 건물에 저격수를 배치했다. 1971년 대선에서 90여만표 차이로 박정희를 위협한 김대중을 2년 뒤 납치해 살해 협박한 것도 그들이었다. 참여정부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를 설치해 40년간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탈탈 털다시피 했다. 2007년 10월 진실위 보고서를 내면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정권이 아니라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간첩 조작’ ‘선거 개입’ 같은 짓은 못할 거라고 다들 믿었다. 국민이 속았다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댓글공작을 시작으로 9년간 벌여온 나쁜 짓들이 물 빠진 갯벌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음지’의 나쁜 전통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00명 정도…한달이면 열번”(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행사를 했지만 여성들에게 건넨 사례비 역시 ‘그들’이 댔다. 40년 뒤 그의 딸도 그들의 특수활동비에서 40억원가량을 가져다 ‘사적 용도’에 썼다. 아버지 때 일들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먼저 요청했을 것이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정치자금을 넣어두고 사위에게 관리를 맡겼던 이후락 정보부장은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40년 뒤 후임자 역시 아내의 사교모임에 안가를 내주고 인테리어 비용으로만 10억원을 썼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진실위를 꾸렸다면서도 그들은 결국 불법사찰·공작을 부활시켰다. 정부에 비판적인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인, 학자는 물론 정부여당 인사까지 뒤를 캤다. ‘대통령 지키는 게 곧 국가안보’라고 합리화했다.
연재김이택 칼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