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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김장 버티기 / 은유

등록 2017-12-08 19:01수정 2017-12-09 10:59

은유
작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는데, 찬 바람이 불면 내 마음엔 커다란 김장독이 산다. 남도의 땅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김치를 중시했다. 배추김치는 기본에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를 번갈아 담갔고 김장철엔 손이 더 커졌다. 김치 가져가라는 전화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선 냉장고에 자리도 없는데 또 담갔냐고 기어코 한소리하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 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 시댁에서 가져온 김치는 빨리 동나고 산 김치는 비싸서 감질나고, 나는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생에 김치노동까지 추가되면 끝장이라는 비장함으로 안 배우고 버텨왔다. 할 줄 알면 누가 시키기도 전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일 게 뻔하니까, 식구들이 잘 먹으면 먹이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말리는 심정으로 김치 먹을 자유보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수호하고 있다.

“이번엔 황석어젓을 사봤는데” “고춧가루 빛깔이 안 좋아서 속상해” “올해는 절임배추 써볼까 하는데” 요즘 시장에서, 거리에서, 버스에서, 목욕탕에서 나이 든 여자들은 둘만 모였다 하면 김장 얘기다. 마음에 김치가 사는 나는 이런 목소리를 줍고 다닌다. 머리가 허옇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도 장바구니 달린 보행기를 밀고 다니면서 쪽파며 배추를 실어 나르는 동네 할머니를 본다.

살아계셨으면 일흔일곱. 우리 엄마도 저이들처럼 억척스럽게 장 보고 김장을 하고 삭신이 쑤신다며 앓아누우셨을까. 엄마는 그즈음 부쩍 음식 간이 안 맞는다고, 뭘 해도 맛이 없고 김치도 짜기만 하다고 낙심했다. 혀가 늙는다는 것도, 김치 담그기가 중노동이라는 것도 삼십대인 나는 알지 못했다. 김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을 그 시절 엄마가 알지 못했듯이.

어쨌거나 나는 매년 김장 김치를 먹는다. 파는 김치는 비위생적이며 당신 손으로 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여기는 시어머니가 담가주시고, 가까운 이들에게 사랑의 김장이 답지한다. 올해는 친구의 시골 노모가 담근 김치를 분양받았다. 양이 많다며 배추김치 한 통에 덤으로 총각김치랑 묵은지까지 보내주었다. 끼니마다 콕 쏘는 김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면서도 목 안이 따끔하다. 한 여성이 소위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듯이, 내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의 산물인 김치를 먹게 된다. 얼마나 손끝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고 생강을 다지고 배추를 씻고 절이고 버무렸을까.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unpaid work)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한 동료의 엄마는 여든살을 맞아 김장을 안 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늦은 은퇴다. 엄마들의 잇단 김장 파업 선언에 김치 난민이 속출하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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