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는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우화 한토막이 등장한다. 고대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가 전하는 ‘쿠라(cura)의 우화’다. 언젠가 여신 쿠라가 강을 건너려다 점토를 발견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쿠라는 점토 한 덩이를 떼어내 빚기 시작했다. 자기가 빚어낸 형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신 주피터가 다가왔다. 쿠라는 형상에 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청했다. 주피터는 쿠라가 해 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하지만 쿠라가 그 형상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 하자 주피터는 대뜸 자기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름을 놓고 쿠라와 주피터가 다투고 있을 때 땅의 여신 텔루스가 끼어들었다. 텔루스는 자기 몸 일부가 형상에 쓰인 것이니 자기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투던 신들은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를 판관으로 모셨다. 사투르누스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주피터는 혼을 주었으니 그 형상이 죽을 때 혼을 받아 가고, 텔루스는 몸을 주었으니 몸을 받아 가라. 하지만 이 형상을 만든 건 쿠라이므로 그 형상이 살아 있는 동안은 쿠라의 것으로 하라.’ <존재와 시간>은 빽빽한 개념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저작이 말하려는 것은 ‘쿠라의 우화’에 요약돼 있다. 점토를 뜻하는 후무스(humus)에서 호모(homo), 곧 인간이 나왔으니 이 우화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시간의 법정에서 살아가는 동안 쿠라를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쿠라는 염려를 뜻하므로, 인간이란 염려하는 존재라는 얘기다. 이즈음 한반도의 정세를 보면 이 인간 규정이 어느 때보다 적실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면 한반도 남쪽의 염려는 부풀어 오른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전쟁을 이야기하면 염려하는 마음의 파고는 한 번 더 솟구친다. 북한은 북한대로 염려 때문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댄다. 염려의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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