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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쿠라의 시절 / 고명섭

등록 2017-12-12 16:28수정 2017-12-12 19:05

고명섭
논설위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는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우화 한토막이 등장한다. 고대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가 전하는 ‘쿠라(cura)의 우화’다. 언젠가 여신 쿠라가 강을 건너려다 점토를 발견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쿠라는 점토 한 덩이를 떼어내 빚기 시작했다. 자기가 빚어낸 형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신 주피터가 다가왔다. 쿠라는 형상에 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청했다. 주피터는 쿠라가 해 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하지만 쿠라가 그 형상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 하자 주피터는 대뜸 자기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름을 놓고 쿠라와 주피터가 다투고 있을 때 땅의 여신 텔루스가 끼어들었다. 텔루스는 자기 몸 일부가 형상에 쓰인 것이니 자기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투던 신들은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를 판관으로 모셨다. 사투르누스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주피터는 혼을 주었으니 그 형상이 죽을 때 혼을 받아 가고, 텔루스는 몸을 주었으니 몸을 받아 가라. 하지만 이 형상을 만든 건 쿠라이므로 그 형상이 살아 있는 동안은 쿠라의 것으로 하라.’

<존재와 시간>은 빽빽한 개념어의 숲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저작이 말하려는 것은 ‘쿠라의 우화’에 요약돼 있다. 점토를 뜻하는 후무스(humus)에서 호모(homo), 곧 인간이 나왔으니 이 우화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시간의 법정에서 살아가는 동안 쿠라를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쿠라는 염려를 뜻하므로, 인간이란 염려하는 존재라는 얘기다. 이즈음 한반도의 정세를 보면 이 인간 규정이 어느 때보다 적실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면 한반도 남쪽의 염려는 부풀어 오른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전쟁을 이야기하면 염려하는 마음의 파고는 한 번 더 솟구친다. 북한은 북한대로 염려 때문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댄다. 염려의 악순환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쿠라의 입김을 헤쳐 나가려면 미국과 북한이 직접 대화로 돌파구를 찾는 수밖에 없는데, 트럼프 행정부에 그럴 의사와 의지가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얼마 전 미국의 유엔대사가 ‘평창겨울올림픽에 미국 선수단을 보내야 할지 걱정스럽다’는 투로 이야기한 것은, 뒤늦게 주워 담긴 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미국 공화당 중진 의원이 ‘주한미군 가족을 모두 철수시켜야 한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북-미 대결의 한 당사자로서 미국이 전쟁 분위기를 잔뜩 키워놓고는 한반도가 위기여서 올림픽 선수들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건 무책임하고도 무분별한 짓이다. <뉴욕 타임스>가 지난 9일치 사설에서 미국 의회와 정부의 호전적인 발언을 비판하며 “미국의 위협 전술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고 쓴 것은 그만큼 사태를 위태롭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때일수록 중요해지는 것이 우리 정부의 평화 건설 의지다. ‘참수부대’를 만들었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것은 휴전선 저쪽의 염려를 키워 더욱 사납게 만들 뿐이다. 그런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언행은 사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 학술행사에서 ‘특사를 파견해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요청하자’고 한 이해찬 전 총리의 발언이야말로 정부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이다. 북한이 참가한다면 평창올림픽은 한반도 상황을 바꿀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려움이 극에 이르렀을 때 반전이 일어난다는 ‘궁즉반’의 정신으로 이 쿠라의 먹구름을 걷어내는 데 지혜와 마음을 모을 때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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