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뮤지션 서울 연남동 4층 빌라에 살던 시절, 빌라 1층 주차장 구석에 고양이 가족이 살고 있었다. 추운 겨울 갓 태어난 새끼 넷이 안쓰러워 하루에 한 번 사료와 물을 주기로 했다. 아내와 번갈아 챙겨주고 있었는데 몇 번이나 그릇이 없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집주인 어른이 치우는 거라면 조만간 경고문이 붙을 것 같고, 그러면 이제 밥도 줄 수 없을 텐데. 그래서 우리는 약간의 꼼수를 부려 저녁 늦게 사료를 주고, 아침 일찍 그릇을 치웠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어미 고양이는 날 보고 “샤~” 하는, 볼드모트 목소리 같은 소리를 냈고, 동시에 새끼 넷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교육을 어떻게나 잘 시켰는지 잘도 숨는다. 어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는 했지만 매서운 눈빛은 변함없었다. 겨울이 지나고, 우리는 경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둘째아이도 태어났다. 네 마리 새끼는 잘 자라고 있을까. 얼마 전에야 문득 고양이 새끼들이 생각났다. 우리도 겨울을 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발밑만 바라보고 살았다. 경주에 자리 잡은 나의 작업 공간 ‘신촌서당’에는 매일 찾아오는 고양이가 있다. 뭐가 목에 걸렸는지 야옹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데 뼈가 보일 정도로 비쩍 말라 있어 근처에서 사료를 얻어 와 줬는데 먹지 못했다. 그나마 캔은 잘 먹어서 캔도 좀 얻어다 아침저녁으로 챙겨주고 있다. ‘고양이야’ 하고 부르다 마침 재미있게 본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조’(Joe)라고 이름 지어주는 장면이 떠올라 ‘조’라고 부르기로 했다. 조는 아침저녁으로 서당 문 앞으로 찾아왔고, 가끔 그릇이 없어지거나 깨져 있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밥을 준다. 목소리도 조금 좋아지기 시작하고 살이 좀 붙으니 작업실 안으로 들어오려 해서 일단 그건 막고 있다. 조는 우리 가족의 대화에 항상 등장하는데, 이런 식이다. “엄마 밥 줘. 앗, 줘(조)는 고양이 이름!”, “그거 아빠한테 줘. 앗, 줘(조)는 서당 고양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조는 우리의 생활에 들어와 있다. 사료를 챙겨주기 위한 꼼수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다시 겨울이 왔다. 며칠 고양이 조가 보이지 않으면서 우리들의 걱정은 시작되었다. 날씨는 더 추워졌고, 작업 공간 근처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데 어디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 건지.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닌데 조가 잘 먹고 다니는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서당에 도착하면 문 앞에 항상 조가 앉아 있어서 나의 하루는 “안녕, 고양이 조!” 하는 인사로 시작했는데. 관계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관계를 이어가는 건 한쪽의 사정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하지만 역시 겨울에 바깥 생활을 하는 건 고양이건 사람이건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조의 안녕을 생각한다. ‘안녕’은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다. 그래서 시작인지 끝인지 ‘안녕’만으로는 알 수 없다. 오래지 않더라도 만났던 시간은 ‘마음 씀’이 탄생하는 순간이고, 헤어지는 건 그 ‘마음 씀’이 자리를 잡는 때가 아닐까. 팔로, 친구 신청, 좋아요, ‘서로이웃’이 많은 시절이지만 여차하면 차단하고 ‘친구 끊기’를 한다. 마음 씀이 탄생하기도, 자리 잡기도 시간은 부족하다. 빌라 주차장 고양이들도 이제 꽤 컸겠지. 1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무섭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고양이 조. 어디서든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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