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주저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행위 능력 가운데 하나로 용서하는 능력에 주목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런데 죄는 일단 저지르고 나면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음’이라는 이 근본적 곤경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용서라는 행위다. 용서받음으로써 인간은 죄의 짐을 벗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용서할 수 없는 죄도 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아렌트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가까스로 피해 생명을 건진 사람이었다. 유대인 학살은 이 용서의 철학자에게도 소화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아렌트는 고백한다. ‘그런 범죄는 인간사의 영역을 넘어서는 근본악이기 때문에 용서를 들먹일 수도 없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홀로코스트 범죄자 아이히만을 교수대에 보내야 한다고 쓴 것은 용서의 한계를 절감한 사람의 결론이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일본군 성노예’ 사건은 어떨까. 그 범죄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어도, 국가가 조직적으로 어린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유인해 성노예로 삼았다는 그 반인륜성에서 보면 본질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 수많은 소녀들의 청춘과 영혼을 참혹하게 짓밟은 국가범죄라는 점에서 이 행위는 인간의 정신적 생명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용서하기 힘든 범죄를 용서하려면 가해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통절한 사죄가 먼저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난해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가 밝혀낸 대로, 박근혜 정부와 아베 신조 정부의 정치적 타협은 사죄의 올바른 내용과 형식을 증발시켰다.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었다느니 하는 망언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사죄’의 못을 박자고 했던 한국의 요구가 실종되고, 일본의 요구대로 다시는 위안부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말자는 ‘합의’에 못을 박는 것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보복도 응징도 아니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을 다해 사죄하라는 것이다. 사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용서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독일이 2차 대전의 범죄를 거듭 사죄하고 후손에게 가르쳐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죄다운 사죄의 모습이다. 12·28 합의는 사죄의 진정성을 찾을 수 없는, 겉모양만 그럴듯한 합의이기 때문에 결격이다. ‘이면 합의’를 채운 문구들은 일본이 저지른 범죄를 감추고 그 파장을 축소하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한국 정부가 이 몸부림을 그대로 받아주었다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잘못에 이은 두번째 잘못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4일 청와대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를 맞이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국빈급 예우로 오찬을 함께하고, 2015년 12월28일 박근혜 정부가 맺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가 ‘잘못된 합의’였다고 공식 사과했다.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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