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밥 안 해놓는다고 자주 갈등 겪어, 잠자던 딸 둔기로 살해한 아버지’. 며칠 전 본 기사 제목이다. 노예제 사회도 아니고 2018년 1월19일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믿기질 않아서 몇 번을 읽었다. 여자가 여자라서 화장실 가다 죽고, 안 만나준다고 전 애인에게 죽고, 밤늦게 다닌다고 남편한테 죽고, 미용실에서 일하다 죽고, 술자리에서 희롱당하는 뉴스가 연일 터지는 와중에 유독 충격이었다. 나는 밥에 대한 글을 참 많이 썼다. 뇌의 반이 밥(걱정)으로 차 있어서다. 누구나 자신이 속박된 주제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밥 얘기를 쓰면서도 스스로 검열했다. 글감치고는 시시한 거 아닌가, 그깟 밥이 뭐라고,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도 아니고…. 그래도 꿋꿋이 썼지만 ‘여자는 밥하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하면 그 말은 어쩐지 우스워 보였다. 저 기사를 보니 웃을 일이 아니다. 밥이 전선이다. 밥 때문에 사람이, 여자가, 맞아 죽기도 한다. 집안도 화장실도 거리도 일터도 일상 동선 어디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여성에겐 그렇다. 인구 절반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하면 ‘망상’ 같지만, 나나 내 딸아이나 동성 친구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건 ‘예상’ 가능하다. 만약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유색인이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하루걸러 죽어도 세상이 잠잠할까. 여성혐오가 대기에 만연하고 사망자가 꾸준히 발생하는데 사람들은 미세먼지만큼도 일상의 재난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안전 불감증을 느낀다. 한번은 강연장에서 한 여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형제를 키우는데 여자애들 등쌀에 아들들 학교생활이 힘들다며 남녀차별 시대가 아니고 여성상위 시대 같다고 했다. 또 예쁜 여자한테 꽃이라고 하는 게 왜 문제냐며 ‘페미니스트들’이 좀 무섭다고 했다. 뭐 그리 생각할 수 있다. 원래 내 불편은 가깝고 남의 불행은 멀어 보인다. 그러나 아들들이 학창 시절 이런저런 불편을 겪는다 한들 딸들처럼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다. 화장실 갈 때나 택시 탈 때마다 불안에 떨면서 평생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꽃처럼 예쁘단 말은 그 자체로 덕담이지만 한 사람이 꽃이 되는 순간, 발화자가 언제든지 꺾어버릴 수 있는 수동적 존재가 되고, 외모노동을 강요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여성이 직장에서 ‘꽃’으로 취급되며 개별적 주체나 실력으로 인정받기보다 성적 대상화와 폭력에 노출되는 게 그 증거다. ‘검사인데도 저런 일을 당하다니 보통 여자들은 오죽하겠냐.’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피해 사실 인터뷰에 대한 인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동안 몰랐나 싶어 조금 놀라기도 했다. 우리 사회 권력 집단에 속한 피해자가 자기 삶을 걸고 방송에 나와 역시 최고의 담론 권력을 쥔 앵커와 마주 보고 증언할 때라야 피해자의 목소리가 겨우 가닿는다. 피해자의 말에 술렁이고 반응한다. 여성혐오로 인한 죽음,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주식 시세나 날씨처럼 매일 생산되는 뉴스다. 한샘 여직원의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게 불과 몇달 전이고,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이년 전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서사가 되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 흩어져버린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 이야기는 반도의 땅 곳곳에 설산을 이루고도 남는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한다고 죽이고 꽃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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