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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삼성, 돈, 돈, 돈…

등록 2018-02-07 18:21수정 2018-02-07 19:34

김종구
편집인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한 첫번째 결정이 ‘평택 반도체공장 30조 투자’라는 뉴스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는 돈의 위대한 힘을 다시 한번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 뉴스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런 통 큰 투자를 결정할 사람은 이 부회장밖에 없다, 역시 그를 석방하길 잘했다, 이 부회장 석방으로 일자리는 늘어나고, 성장동력에 가속도가 붙고, 한국 경제는 더욱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재벌 총수를 풀어주면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오랜 미신은 세월이 가도 흔들림이 없다.

감옥을 나서는 이 부회장의 모습은 개선장군의 그것이었다. 특검은 교묘하고 악랄한 덫을 쳐놓은 악한들이고, 그는 필사의 노력 끝에 덫에서 빠져나온 용감한 영웅이었다. 그의 석방에 대다수 신문은 환호했다.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됐다 풀려난 민주투사를 향해 보내는 듯한 우렁찬 박수갈채가 신문 지면마다 뜨겁게 울려 퍼졌다.

이 부회장이 비록 석방은 됐지만 범법자라는 사실은 아직 변함이 없다. 항소심 판결만 따르더라도 그는 36억원의 뇌물공여, 횡령, 범죄수익은닉 혐의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다. “법은 큰 파리는 빠져나가고 작은 파리만 잡히는 거미줄”(발자크)이라는 말도 있지만, 집행유예 자체가 엄청난 특혜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자숙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게 국민에 대한 예의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한국 경제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듯 사뭇 의기양양하다. 그의 행보는 ‘법치주의와 정의 실현을 포기한 대가로 당신네 살림살이가 좋아지니 잠자코 닥치고 있으라’는 씁쓰레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경기도 평택에 30조를 들여 반도체공장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한 이 부회장의 결정이 현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또한 분명하다. 문재인 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자리 창출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손짓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삼성의 숙원 사업이었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마무리된 뒤 이 부회장의 첫번째 대외 일정이 ‘창조경제’ 챙기기였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의 석방에 쌍수를 들어 환영한 어느 신문은 ‘사업보국’이라는 말로 이 부회장을 고무·격려했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 만큼 기업을 잘 이끄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이야기다. 사업보국은 삼성의 사훈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서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 부회장에게는 서운한 말이겠지만, 국내 최대의 재벌기업 총수라고 해도 법 앞에 평등하고 사법적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보국의 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여보게 신참, 여기는 정의가 아니라 법을 다루는 법정일세.”(This is a court of law, young man, not a court of justice.) 미국의 연방대법원 판사였던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법과 정의가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법정’의 절묘한 영어 표현에 담아 나타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법 사상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웬들 홈스의 말에서는, 법원이 아무리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해도 미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 느껴진다. 이에 비하면 삼성 판결을 내린 정형식 재판장은 너무나 오만하다. 그는 “법리는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었고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고 잘라 말했다. 과연 그런가. 아무리 봐도 정 재판장이 주재한 법정은 ‘정의의 법정’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법리를 다루는 데 충실한 법정도 아니었다. 철 지난 정경유착의 사례를 끌어다 무죄의 이유로 삼은 것을 비롯해 곳곳에서 허점투성이다.

지금까지 경험에서 확인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재벌은 결코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권력의 ‘겁박’으로 돈을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특검이 말한 대로 소가 웃을 이야기다. 삼성보다 힘이 더 없는 대기업 중에도 정권의 겁박에 굴하지 않고 돈을 내지 않은 기업이 많다. ‘인풋’과 ‘아웃풋’의 효과를 주도면밀하게 계산해 돈을 쓰는 대목에서 삼성을 따라갈 기업이 없음을 천하가 아는데도 정 재판장만 외면했다.

“판사란 자기 답안지를 스스로 채점하는 로스쿨 학생과 같다.” 미국 저널리스트 헨리 루이스 멩켄이 남긴 신랄한 말이다. 정 재판장의 지금 모습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정 재판장은 자신이 작성한 답안지가 만점이라고 우긴다. 하지만 그 답안지가 낙제점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은 필연이다. 대법원이든, 아니면 역사의 법정에서든.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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