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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염치 있는 날 / 김종옥

등록 2018-02-09 17:30수정 2018-02-09 19:37

김종옥
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친구야, 여행은 잘하고 있니? 나는 오늘 별난 하루를 보냈어. 아침에 장애인고용공단 농성장에 갈 때만 해도 일상의 시작이 느긋했는데 말이지. 이번 농성은 장애인에게는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을 폐지하고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를 많이 마련하라는 게 주요 요구야. 누구나 일하면 최저임금 이상을 받아야 하지만 장애인들은 적용 제외 대상이었거든. 일을 잘 못하니까 일 값을 덜 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지. 최저임금제가 곧 그 사회의 사람 대접 수준이라고 본다면, 장애인은 제외해도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저열한 발상이냐. 최저임금 때문에 장사하기 어렵고 일자리도 준다고 난리치는 염치 좋은 사람들에게 장애인 최저임금 보장을 말하려니 어쩌겠니, 농성이라도 하고 나서야지. 80일차가 되어가는데, 한편으로 참 다행이야. 길바닥에서 시작했더라면 이번 겨울을 어쩔 뻔했니. 그래, 좋아서 하는 소리야, 좋아서.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왔어. 아파트 뒤쪽 베란다 배수구에서 물이 역류해서 난리래. 베란다에서 물 쓰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는데도 기어코 세탁기를 돌린 염치 좋은 이웃이 있었던 게지.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오는데, 이번엔 엄마한테서 전화가 오는 거야. “얘, 내가 일찍 가려는데 ○○ 에미가 일 다 해놓을 테니 느지감치 오라는 거야. 늙은이에게 일을 주면서 어서 오시라고 하는 게 대접인 걸 걔는 왜 여태 모른다니….”

분주하게 오가며 여럿 먹이는 일 하고 싶은 엄마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만, 남의 집 며느리인 울 언니 딱하긴 마찬가지야. 언니랑 영화 라도 찾아서 봐야겠어. 대리만족이라도 하게. 이렇게 엄마 전화를 건성으로 받고 있는데 택시가 좀 이상한 거야. 자꾸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꿀렁꿀렁하며 달리고 있는 거지. 전화를 끊으니 기다렸다는 듯 기사 아저씨가 여기에는 30년 전에 무슨 건물이 있었고, 이 길은 40년 전에는 몇 차선이었고 그러시더군. 그러더니 목소리가 젊어서 그렇지 당신 나이가 일흔일곱이라고 자랑하시는 거야. 아저씨, 아니 어르신께서는 녹슬지 않은 운전 실력을 과시하려는 듯 액셀과 브레이크를 마구 밟아가며 달리고, 나는 무사히 도착한 뒤 아저씨, 아니 어르신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내렸어. 어쩐지 민망하고 어쩐지 짠해서 말이지.

집에 오니 관리 아저씨가 아랫집 홈통을 녹여서 물을 빼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 내려가셨어. 그 고단한 뒷모습에,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 붙여놓은 안내문이 겹쳐 보였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하여 경비원과 청소 아줌마의 근무시간을 조정합니다, 라는. 이제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는 아주 넉넉한 중간 휴식시간을 갖게 되셨으니 그 시간에 아파트 입주자대표자들 집에 가셔서 충분히 쉬고 놀고 하시며 시간을 보내셨으면 해, 부디.

참, 염치도 좋지. 같이 지내며 아침저녁 얼굴 마주치는 사이에 미안하지도 않나. 나는 이제 아저씨들하고 웃으며 인사도 못 하겠다 싶어. 게다가 내일은 장구 배우러 가는 날인데, 내가 커다란 장구를 들고 갈 때마다 부러워하던 청소 아주머니 얼굴은 또 어찌 보누.

누구나 제값으로 대접받고 일하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장구도 두드리고, 남북 어울리는 올림픽이나 보면서 머잖아 곧 금강산 여행길도 열리려니 희망도 품어보고, 이러고 사는 게 맞지 않니? 뭔 세상에 이렇게 염치들이 없는지….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어서, 하루종일 일과 염치 생각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니까. 그래, 어쨌든 넌 여행이나 잘하고 와. 좋은 일은 미루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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