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가 일본 교토의 은각사엔 원숭이가 없다. 그런데 저 흑인 꼬마는 왜 우리를 따라다니며 불러대는가? “몽키, 몽키!” 부모와 떨어지자 더 크게 외쳤다. 에프(F)로 시작하는 욕설도 섞었다. 참다못한 동행이 다가가 조곤조곤 타일렀다. 꼬마는 변명을 하다 부모가 나타나자 쪼르르 달려갔다. 우리는 분을 참고 다시 오솔길을 걸었다. 꼬마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부모는 들리지 않고 우리는 들릴 만한 거리에서 다시 불렀다. “몽키, 몽키!” 금각사엔 금빛의 누각이 있지만 은각사엔 은빛의 정원이 있다. 거기엔 꽃도 나무도 없다. 모래들만 단정한 무늬로 누워 있다. 나는 그 욕심 없는 정원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사탕 봉지가 떨어지길래 얼른 주워들며 생각했다. 여기도 때론 비가 내리치고 바람이 쓰레기를 몰고 오겠지. 그러니 승려들은 아침저녁으로 모래알을 쓸고 다듬어야 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며 꼬마의 조롱에 흔들린 마음을 달랬다. 내 집에도 모래 정원이 있다. 그러나 내 소유는 아니다. 정원의 주인은 욕쟁이 꼬마와 비바람 요괴는 콧방귀로 날려버릴 말썽꾼들, 그러니까 20년 묵은 고양이 두 마리다. “몽키, 몽키!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몽키, 몽키! 더러운 화장실 쓰느라 얼마나 짜증났는지 알아?” 나는 천지사방으로 튄 모래를 쓸고, 똥오줌이 뒤섞여 굳은 덩어리를 봉투에 담아 일어섰다. 허리에서 욱신한 통증을 느끼며 피안의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아직 떠날 때가 아니었다. 로버트 피어시그는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제목으로 800쪽짜리 책을 썼다. 내겐 고양이 화장실이 그 정도의 문제다. 초창기엔 별 탈이 없었다. 고양이는 배변의 흔적을 잘 숨긴다. 적당한 위치에 모래만 깔아두면 금세 찾아가 잘 싸고 덮는다. 그런데 슬슬 똥을 싼 뒤에 덮는 시늉만 하고 튀어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어차피 관리사가 치울 테니 덮는 건 허례허식이라 여긴 걸까? 처음엔 냄새 때문에 괴로웠지만 점차 코가 둔해졌다. 십여 년이 흘렀고 문제의 순간이 왔다. 어느 날 첫째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에서 튀어나왔다. 한참 안절부절못하더니 양변기로 올라갔다. 녀석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인간 변기를 쓴 적이 있다. 거기에서도 해결이 안 되었다. 이번엔 내 무릎에 올라와 힘을 줬다. 찔끔하고 진한 색의 액체를 흘렸다. 녀석은 엉덩이를 핥더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방광염이었다. 이후 두 늙은 고양이는 번갈아 잔병치레를 하며 화장실 문제를 일으켰다. 최근엔 몸은 화장실에 넣고 모래 밖으로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넓히고 수를 늘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벽을 높이고 입구만 낮췄더니 입구에서만 쌌다. 고심 끝에 이중삼중의 장치를 만들었다. 스티로폼으로 넓게 바닥을 깔고 그 안에 화장실을 올렸다. 하나는 뚜껑을 덮고 다른 쪽은 열어놓았다. 화장실 모래는 가운데는 낮게 주변은 높게 했고, 스티로폼 위도 얇게 모래를 깔아 만약을 대비했다. 아침저녁으로 밭을 갈듯 고양이 화장실을 치운다. 때론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다. 그때는 은각사의 정원을 떠올린다. 인생에는 제 맘대로 되지 않는, 그러나 계속 책임져야 하는 일이 있다. 기껏해야 현상 유지가 최선인데 하루라도 버려둘 수는 없다. 고양이 화장실은 그중 소박한 종류다. 나는 모래를 다듬으며 세상의 거친 욕설과 잡스러운 고민을 떨치기도 한다. 그러면 감사하게도 두 마리가 찾아와 소중한 볼일을 보아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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