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의 앞머리에 붙이는 사람·동물 따위의 갖가지 형상을 선수상(船首像)이라고 한다. 장식용 또는 안전을 기원하는 종교적 목적으로 쓰였다. 거북선의 ‘용머리 선수상’은 적군 위협용이었다. 영어로는 ‘피겨헤드’(figurehead)라고 하는데, ‘명목상 최고위자’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겉보기엔 배의 맨 선두에 있지만 실제로는 힘없는 조각상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허울뿐인 최고위직’을 조롱할 때 쓰인다.
영어 ‘피겨헤드’와 비슷한 우리말이 ‘바지사장’ 아닐까 싶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엔 올라 있지 않지만 널리 쓰이는 단어다. 어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주관도 없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일컫는 ‘바지저고리’라는 표현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총알을 대신 받아준다는 의미의 ‘총알받이’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예인선에 끌려다녀야 하는 ‘바지(Barge)선’이 어원이란 얘기도 있지만 모두 근거를 확인하기 어렵다.
바지사장이란 존재 자체가 숨김과 거짓에서 출발한다. ‘검은 거래’를 감추고 위장할 일이 많은 유흥업소나 도박장, 탈세조직 따위에서 자주 출몰한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청와대발 정치뉴스’에 바지사장이 자주 등장했다. 최순실은 바지사장을 내세워 미르재단, 케이스포츠재단을 쥐락펴락했다. 대통령도 최순실이 내세운 바지사장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바지사장을 유난히 ‘애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다스 사장을 했던 김성우, 강경호씨가 검찰에서 ‘엠비의 바지사장’이었노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다스 실소유주가 ‘엠비’라면 비비케이, 도곡동 땅도 바지사장을 내세운 위장거래일 수밖에 없다. 복잡하지만 연결 고리가 그렇게 이어진다. ‘엠비 사저’를 지으려 했던 내곡동 땅 거래에서도 바지사장이 등장하는데, 대통령이 된 이후의 일이다. 국민을 ‘바지저고리’로 여기지 않았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싶다.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1937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들어진 배의 선수상. 사진/리차드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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