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논설위원
한국지엠(GM)에 대한 산업은행의 경영 실사가 지연되고 있다. 이동걸 산은 회장과 지엠 본사의 배리 엥글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지난달 21일 실사에 합의했으나, 보름이 지나도록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이 회장은 그동안 지엠이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아 불신이 쌓였다는 점을 지적했고 엥글 사장도 이를 인정하고 협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말뿐이다. 한국지엠은 국내 자료는 제공할 수 있으나 미국 본사와의 거래 자료는 공개하기 어렵다며 버티고 있다고 한다. 한국지엠의 부실 원인을 따져보고 생존 가능성을 확인하려면 지엠 본사와의 거래 자료가 필수적이다. 정확하고 투명한 실사는 한국지엠 정상화의 첫걸음이다. 지난해 4월에도 지엠이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 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산은의 실사가 무산된 바 있다.
‘한국지엠 사태’의 본질은 간명하다. 지엠 본사가 일자리와 지역경제를 볼모로 한국 정부를 압박해 지원을 받아내려는 것이다. 지엠 본사는 고금리 대출, 불합리한 이전가격, 지나친 비용 전가 등 비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한국지엠의 이익을 곶감 빼먹듯 가져갔고 그 결과 한국지엠은 부실의 늪에 빠졌다. 한국 정부가 지원을 해주면 한국 시장에 남고 지원이 없으면 떠나겠다는 게 지엠 본사의 입장이다.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앞서 호주와 인도 등지에서도 그랬다.
앞으로도 지엠이 한국에서 장기간 사업을 계속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지엠의 진정성만 보장된다면 우리 정부도 지원에 나서야 한다. 고용 유지와 지역경제 안정을 위해서다. 다만 한두 종류의 신차를 한국지엠에 배정하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엠의 핵심 사업인 전기차나 자율주행차 중 하나를 한국지엠에 맡길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 얼마 안 가 또 우리 정부에 손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지엠의 그동안 행태를 감안하면 기대하기 쉽지 않은 결정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지엠의 철수를 막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예 판을 새로 짤 수도 있다는 각오로 협상을 해야 한다. 당장의 충격이 두려워 미봉책으로 수습하면 지엠에 계속 끌려다니게 된다. 물론 실업 대책과 지역경제 지원 방안 등 만반의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 산업은행, 노조 등 이해관계자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부 갈등과 분열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은 딴소리를 한다. 홍준표 대표는 한국지엠 협력업체들을 찾아가 “우리나라가 법인세를 올려 자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했다. 정치 공세다. 또 지엠 본사에 대한 책임론과 먹튀 논란을 “좌파들의 시각”이라며 “반미사상을 고취해 지엠을 공격하면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고 했다. 대한민국 공당의 대표라면 지엠 본사의 책임부터 묻는 게 순리인데 되레 두둔하고 나섰다.
<조선일보> 등 일부 보수언론은 일차적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낮은 노동생산성이 부실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고 노조의 주장 가운데 지나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영난의 가장 큰 책임을 노동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지엠 본사의 잘못을 합리화해주는 결과를 낳는다.
지엠 본사가 지난달 13일 군산공장 폐쇄 방침을 발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지엠 군산공장이 디트로이트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보면 지엠의 협상력에 힘을 보태주는 발언이었다. 트럼프처럼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최소한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는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아군에게 등 뒤에서 총질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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