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동성 친구에게 힘든 얘기를 잘 안 한다고 남자 지인이 말했다. 그 자리의 네댓 명이 대체로 동의했다. 내 아버지나 남편, 동료들을 봐도 결정적인 고민은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친구랑 전화통 붙들고 운다. 친구의 긴급 호출도 물론 온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왜 그런지 토론했다. 한 중년 남성은 사회생활의 경쟁 시스템에선 하소연이 곧 약점이 되어 불리하니까 숨긴다고 했다. 여자들의 고민 공유, 즉 수다는 약자들의 연대라고 나는 말했다. 말해봐야 잃을 것도 없고, 말이라도 해야 후련하니까. 일종의 궁여지책이다. 품앗이처럼 말하고 들어준다. 그러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타인의 처지도 공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난 어려서부터 엄마가 친지랑 전화 통화하는 걸 엿들으며 여자의 일생을 배웠다. 이런 소소한 일상의 누적이 여성의 공감 능력을 신장시켰을 거다. 반대로 ‘센 척’하느라 말하고 듣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남성은 공감 능력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을 테고. ‘수다’를 떨지 않는 아버지들은 풀어내지 못한 자기 고충을 ‘주사’로 토한 것도 같다. 모든 존재의 행위는 저 살려고 하는 일. 여성학자 벨 훅스가 말한 ‘감정적 자기 절단’이 남자들 생존에 유리한 시대가 있었다. 그 긴 세월 부작용이 일상의 폭력을 낳았음을 미투운동이 증명한다. 미투운동이 일자 술렁이는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잠잠했다. 참회하느라 그런다, 켕겨서 그런다, 조심하느라 그런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내가 볼 땐 몸치처럼 주춤했던 거 같다. 타인의 고통에 깊게 개입하고 슬픔의 장단을 맞춰본 적이 없기에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그 와중에 딸 키우는 아빠로서 미투운동을 지지한다는 글을 봤다. 어딘가 궁색하고 근원이 수상쩍다. ‘아무 남자에게 내 딸 못 준다’는 말이나, 티브이 자막에 박히는 ‘딸바보’ 인증이 거북살스러운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 정서와 내 핏줄의 안위가 중한 가족주의에 기반한 발언이다. 그냥 단독자로서 어른 남자이기만 해서는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건 많이 어색하고 어려운 일일까.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헬멧에 세월호 리본을 부착한 김아랑 선수가 화제였다. 환한 미소만큼 인품이 돋보였다. 속사정을 알진 못하지만 김아랑 선수의 공감이 적어도 부모나 누이로서, 즉 혈연을 매개로 한 반응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슬퍼하고 슬픔의 인파가 빠져나간 자리에서도 묵묵히 애도했기에 울림이 더 컸다.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이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이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 남 일에 무관심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올릴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 관계의 무능함으로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엽서에서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