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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대금 바꾸기 / 김종옥

등록 2018-03-16 18:07수정 2018-03-16 19:14

김종옥
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몇년 전에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대금을 즐겨 연주하셨는데 가끔가다 내내 불던 대금을 부러뜨려 버리곤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래 불면 대금 속이 너덜너덜 지저분해져서 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는 법이라고, 그러면 버려야 한다고 하셨단다.

나는 악기는 오래 쓸수록 길이 나서 점점 더 좋은 소리를 내는 줄 알았었다. 몇백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악기의 주인이 사는 동안까지는 결 고운 소리를 계속 내주는 줄 알았다. 그 무겁고 아득한 소리를 내주는 대금이 오래 불면 속통이 낡아서 지저분한 소리가 난다니, 그리되면 미련 없이 부숴버려야 한다니 참 뜻밖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 속이 거칠어진 대금이 자꾸만 떠오르면서 그 대금에다가 나를 갖다 대게 되었다. 나의 내면은 아직 매끄럽고 단단한가, 아니면 가시가 일어나 낡고 해져가고 있는가. 나의 대금은 지금 정제된 소리를 내고 있는가, 아니면 속통이 너덜너덜해졌는가. 사람이 하는 말은 일정 부분 독이라, 많은 말을 할수록 독도 쌓이겠지. 비록 상대는 내 말을 아름답게 여길지라도 말을 뱉는 나는 많은 말을 할수록 공허하기 마련이다. 어눌했다 싶으면 어눌했던 것 때문에, 잘했다 싶으면 반지르르한 덧칠 때문에 저녁이면 하루 종일 무언가 빠져나간 목울대가 부끄러움에 잠겨버린다.

힘을 빼고 슬며시 통과한 바람이라면 대금의 속통을 덜 거칠게 했을 게다. 가시 돋친 날 선 소리, 뭉툭하게 내지르는 소리, 새청맞고 야멸찬 소리, 흐르는 독이 묻어 있는 경박한 소리들이 대금 속을 거칠게 일어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라고 천년만년 가는, 세상에 없는 대금으로 태어났을 리 없으니 나 역시 소리를 내면 낼수록 그만큼 속이 너덜너덜해졌겠다. 그러니 어쩌랴, 독이 쌓일 것이 무서워 아예 소리를 내지 않아도 대금은 못 쓰게 될 터이니 단단한 내면을 가진 소리 좋은 대금이 되려면 낡은 것을 부수는 혁신이 필요한 일이다. 혁신과 결단, 이 좋은 진단에 맞춤한 처방전으로는 여행만한 게 없다. 기승전여행이다. 내게는 그렇다.

이번에는 혁신할 대금이 셋이다. 팔순을 맞은 엄마, 올케언니와 함께 하는 짧은 여행이다. 너덜너덜해진 지 한참 되었을 울림통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어떨까 사뭇 긴장된다. 반나절 이상을 같이하면 한번은 꼭 다투고 마는 남다른 모녀지간인지라, 한나절 이상을 같이 있으면 한번은 꼭 억울한 사람이 생기고 마는 평범한 고부지간인지라 우리들의 여행기가 어떻게 쓰일지 궁금하다.

집안의 일상사 말고 미투운동이며 남북문제며 얘기하며 팔순 노모를 포섭 공작하려는 내 섣부른 야심은 내려놓으련다. 정색을 하고서 세상이 딸과 며느리에게, 그리고 약자에게 좀 염치 있는 곳으로 바뀌어가야 한다는 얘기 같은 것도 하지 않으련다. 손꼽아 기다리던 금강산 여행을, 날씨가 안 좋다는 이유로 엄마가 연기시키는 바람에 그예 못 보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도 하지 않겠다(떠오르긴 하겠지만 발설하진 않겠다).

그저 너덜너덜해졌을 각자의 속통을 들여다보고 다스려보는 세 여인의 소풍에 집중하련다. 역마살이 있는 게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삶이란 여행이요 소풍일 테니, 엄마에게는 팔십년 삶이 어떤 여행이었는지 나 대신 살랑이는 봄바람이 슬며시 물어봐줄 일이다.

추신: 먼 여행 떠난 스티븐 호킹에게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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