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팀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서울중앙지검 기자실 부스에 앉아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 툭툭 치며 밖으로 불러냈다. 기자실에서 보도지원 업무를 하는 검찰청 직원(기자들은 ‘기자실장님'이라고 부른다)이었다. 복도로 나온 내게 그가 갓 나온 따끈한 검찰동우회 소식지를 건넸다. “거기 누가 뭘 썼던데….” 20년 넘게 기자실에서 일한 그가 감별한 것이면 확실한 기삿거리였다. 검찰청 구내식당 구석에서 두툼한 소식지를 들췄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한보-김현철 수사’ 등을 이끌었던 원조 특수통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의 기고문이 보였다. 제목은 ‘수사십결’. 바둑돌을 놓을 때 명심할 열 가지 교훈인 ‘위기십결’의 검찰 수사 버전이랄까.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검찰 수사 방식을 둘러싼 비판이 거셀 때였다. 그 역시 작심하고 후배들에게 따끔한 조언을 내놓은 것이다. 새겨들을 내용이 많았다. ‘칼은, 찌르되 비틀지 마라’, ‘피의자의 굴복 대신 승복을 받아내라’, ‘수사하다 곁가지를 치지 마라’, ‘독이 든 범죄정보는 피하라’, ‘칼엔 눈이 없다. 잘못 쓰면 자신도 다친다’…. 이런 문구는 지금도 검찰 안팎에서 곧잘 회자된다. 검찰이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숨가쁘게 달려온 과거 정권 수사가 마지막 결실을 보는 참이다. 수사팀은 공들인 그림에 ‘화룡점정’만 남겨뒀다. ‘수사십결’을 떠올린 이유는 마지막 눈동자를 제대로 그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검찰뿐 아니라 ‘불행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에게 ‘굴복이 아닌 승복’을 받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을 단죄하는 일은 신중해서 나쁠 게 없다. 혹시 칼을 비틀고 있진 않나? 곁가지를 친 건 아닌가? 언론은 독이 든 정보 혹은 불필요한 피의사실까지 받아쓰지 않나? 잘 흘러오던 수사 막판에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 구속영장 청구를 앞두고 부인 김윤옥 여사 등 가족 관련 뉴스가 유독 많이 쏟아졌다. 뭉칫돈을 김 여사에게 줬다는 진술이 공개되고, 김 여사가 다스 법인카드로 수억원을 썼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 여사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기사가 이어졌다. 또 여러 장면에서 김 여사의 명품 핸드백 수수 의혹이 불거지고, 딸과 사위, 아들, 양복과 코트까지 등장하는 ‘디테일’이 넘쳐난다. 과거 핵심 참모였던 정두언 전 의원은 김 여사를 겨냥해 “사고 쳤다”, “경천동지할 일이 있었다”며 군불을 땠지만, 핵심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죄가 있다면 누구나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망신 주기는 경계할 일이다. 김 여사가 실내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자신의 집 테라스에서 찍힌 사진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됐을 때는 솔직히 속내가 복잡했다. 그 사진이 보도 가치가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억울했을 2009년의 노 전 대통령과 그가 썼던 글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불평할 처지는 아닙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자유, 마당을 걸을 수 있는 자유, 먼 산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정도는 누리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심재륜 전 고검장은 당시 ‘수사십결’ 기고문에 “수사의 목적은 달성하되 공연히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 수사도 퇴각할 때 더 큰 지혜가 필요하다”고 썼다. 군더더기 없는 결말, 깔끔한 매듭이 필요한 때인 듯하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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