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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 이길보라

등록 2018-03-30 18:45수정 2018-03-30 19:2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얼마 전 베트남에 다녀왔어요. 2014년 겨울에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 기획을 시작한 이후 네번째 방문이었지요. 처음 베트남 중부에 도착했을 때는 ‘할아버지가 이곳 어딘가로 군함을 타고 도착했겠지’ 하며 당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베트남 중부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런지 그곳에서 만난 이들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네요.

1971년 봄, 당신은 베트남 전쟁에 맹호부대 장교로 파병되었다고 했지요. 열여덟살이었던 제가 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자 당신은 베트남의 어느 도시를 가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호찌민부터 하노이까지 방문했던 도시를 쭉 열거하자, 당신은 그중 한 해안 도시를 짚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지요. 저는 그때 당신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구강암과 폐암이라고 했지요. 평소에 건강을 우선시했던 당신은 꽤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과 표창장을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던 당신의 모습이 저는 좀 의아했어요. 당신은 제가 자라 베트남전에 대해 물어볼 틈도 없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니, 사실 할머니는 “잘 모른다”고 했지요. 어렸을 적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것은 기억하지만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이 왜 그곳에 갔는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둘이나 낳은 나랑 이혼하려고, 네 할아버지는 이혼비를 벌러 월남에 갔어”라고 할머니가 말하는 순간 저는 책에서 읽었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당신과 할머니의 이야기, 베트남 중부에서 학살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만나는 순간 저는 이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작업을 하는 내내 당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약 32만명의 한국군이 미국의 동맹군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그 전쟁 특수로 한국은 급속한 경제 도약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할아버지가 보낸 그 돈으로 할머니가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살림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온몸이 굳었어요. 한국군에 의해 온 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그 마을들의 ‘따이한’(한국) 제사에 다녀올 때마다 저의 뿌리와 이곳에서 있었던 학살의 기억이 겹쳐 죄책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밥 먹고 가라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먼저 손을 잡은 건 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주머니였어요. 그녀가 내주는 밥은 베트남의 그 어떤 음식보다 따뜻하고 맛있었어요.

올해는 하미 마을과 퐁니·퐁넛 마을 학살 50주기였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주머니는 제 손을 붙잡으며 말했어요. 사과받고 싶다고, 그 당시 가족들을 죽이고 온 마을을 불태웠던 한국군에게 직접 사죄받고 싶다고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보다 정확한 사죄, 무엇보다 당신으로부터의 사죄를 받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아니, 그녀가 해준 그 따뜻한 밥의 힘으로요.

할아버지, 곧 그 아주머니들이 한국을 방문해요. 4월21일부터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에서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기 위해서요. 월남 참전군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 이제는 당신이 대답할 차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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