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논설위원
1995년 1월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김대중은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고위급회담 대표와 통일원 차관을 지낸 임동원을 삼고초려 끝에 평화재단 사무총장으로 영입했다. 임동원은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남북대화의 주역이었다. 첫 만남에서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남북통일 방안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서로 옳다고 여기면 양보가 없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어떤 때는 호텔에 투숙하여 밤새 토론하기도 했다.”(<김대중 자서전>) 그 토론 끝에 완성된 것이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3단계 통일론’이었다. 두 사람이 특히 숙의를 거듭한 것은 3단계 중에서도 첫째 단계인 ‘남북연합’이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은 통일 방안을 놓고 긴 논쟁을 벌였다. 김정일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하자고 고집했고 김대중은 연방제를 앞세우는 통일 방안은 수용할 수 없다며 연합제를 주장했다. 배석한 임동원이 끼어들어 연합제와 연방제의 차이점을 상세히 설명했다. 김정일은 결국 임동원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그리하여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자’는 6·15공동선언의 제2항이 도출됐다. 북이 남의 남북연합 방안을 내용상 받아들인 합의문이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 <한겨레>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남북정상회담 준비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이번 회담들과 앞으로 이어질 회담들을 통해 한반도 핵과 평화 문제를 완전히 끝내야 한다.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을 ‘남북연합’에 비추어 이해해보면 어떨까. 남북연합은 남북 양쪽이 각각 완전한 주권을 보유한 상태에서 국가연합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서로 다른 국가,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하는 ‘2체제·2국가’라는 점에서는 ‘따로’ 사는 것이지만, 국가연합이라는 큰 틀에서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는 ‘함께’ 사는 것이다. 남과 북이 ‘따로 또 함께’ 사는 방안이 남북연합이다. 그러나 남북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먼저 북한 핵 문제가 해결돼 정치적 신뢰가 구축돼야 한다. 2000년 정상회담에서는 이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북이 ‘비핵화’ 의지를 밝힘으로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순항 조건이 충족됐다. 두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가 일거에 맞교환된다면, 남과 북이 남북연합을 향해 나아갈 발판이 마련된다.
남북연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시 말해, 남북의 교류와 협력의 마지막 단계에서 성취되는 목표가 아니라 남북의 적대에 마침표를 찍고 공존의 기반을 닦는 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더 단단히 다짐으로써 북이 걱정하는 체제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길이기도 하다. 연합의 틀 안에서 남과 북은 전면적인 경제협력으로, 한반도경제공동체 건설로 전진할 수 있다. 두 정상회담이 성공하고 후속 회담이 이어져 남북연합 혹은 남북연합에 준하는 남북협력체제가 들어서게 된다면, 말 그대로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남과 북이 상생의 파트너로서 함께 번영하는 전인미답의 길이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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