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이 작은 나라가 겨울올림픽에 강한 줄 몰랐다. 막상 살아보니 이해가 가긴 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어렸을 때부터 매일같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볕 좋은 여름이 되면 풍덩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 겨울이 되어 암스테르담의 운하가 얼면 집에 있던 스케이트를 꺼내 도시 한가운데서 스케이팅을 즐기는 이들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덕분에 환경을 파괴하는 올림픽에 반대하는 나조차 평창 겨울올림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주변에서 하도 “너희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역사적인 순간을 놓쳐 아쉽지 않아?” 하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고 88 서울올림픽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내게 올림픽은 너무나 먼 관심 분야였다. 그러나 올림픽이 시작되자마자 북한 사람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 때였다. 대한민국 국기 대신 한반도기가 펄럭였고 하얀색 패딩을 입은 선수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으로는 북한 삼지연 예술단의 강릉 공연이었다. 한국전쟁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며 평생을 한반도의 이념 전쟁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노래 ‘반갑습니다’ 반주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은 화면 하단을 향해 있었다. 자막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막은 뜨지 않았고 귀에 들리는 건 나의 모국어와 닮은 언어였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매일같이 보는 건 영어 자막이 있는 영상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영상 또한 자막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자막 없이도 나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통일’은 어렸을 때 포스터·표어 대회와 글짓기 대회에서만 쓰던 단어였다.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김대중 정부 때 초등학교를 다니고 노무현 정부 때 중학생이었던 내게 ‘평화’는 이상하게도 아주 일상적인 단어였다. 학교에서는 우리가 아직 휴전 상태이고 그렇기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한테 편지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맘만 먹으면 비행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이곳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표어를 썼지만 동시에 북한은 빨갱이의 나라라고 배웠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통일이고 북한이었다. 언젠가 나의 스승이 이렇게 물었다. 1920년 서울역은 국제역이었다고. 서울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다고. 서울역을 국제역으로 되돌리는 것, 왜 안 되겠냐고. 나는 ‘에이, 설마’ 하고 코웃음을 쳤다. ‘통일’이라니. 이상한 단어였다. ‘내 생애 그런 날이 올까. 지금도 충분히 평화로운데 왜?’ 하고 생각했던 내가 북한 예술단이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따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너무 신파적인 것 같아 울고 싶지 않은데 계속 눈물이 났다. 난생처음 ‘통일’ ‘휴전’이라는 단어가 몸에 들어왔다. 사실 한번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상조차 금지된 구역. 어쩌면 내 생애 이곳 네덜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는 정말로 그 질문이 유효해진 것이다.
이슈한반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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