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판문점 선언에 이어 북한 핵실험장 공개 추진까지 비핵화 일정이 숨가쁘다.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정상회담 때보다 여건도 좋고 기대도 높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 모두 임기 초반이란 점도 평화협정과 그 이후 일정의 전망을 밝게 한다. 무엇보다 합의문의 실현 가능성을 높여주는 건 북한의 태도 변화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에 따르면 이미 2012년 무렵부터 김정은 위원장이 베트남 등 사회주의권 개혁개방 정책 연구를 김일성대학에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4월 노동당 전원회의의 ‘경제건설’ 선언에 이어 “종전·불가침만 보장하면 왜 핵 갖고 어렵게 살겠냐”며 ‘비핵화’를 재확인했다. 김 위원장이 ‘배고픈 핵보유국’ 노선을 포기하고 외자유치를 통한 경제개발 노선을 선택했다고 볼 만하다. 우리에게도 평화 정착과 함께 경제 회생과 번영의 기회가 주어졌다.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잡았다’는 한 칼럼 표현도 과하지 않다. 냉전시대 유산인 과도한 국방·안보 비용을 그대로 짊어지고는 4차 산업혁명도 어렵고 복지국가 실현도 벅차다. 인구절벽·소비절벽·일자리절벽으로 꽉 막힌 경제에 돌파구를 열 새 성장동력을 북방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게 창조경제다. 남북이 평화·번영으로 가는 길엔 걸림돌도 적잖다. 치밀하게 일정표 짜고 돌부리도 미리 피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거의 ‘실패’를 제대로 알아야 미래의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그동안 비핵화 협상 실패 책임을 북한에만 전가하는 주장이 많았다. 절반만 맞는 얘기다. 1994년 카터 방북으로 위기를 넘긴 뒤 10·21 북-미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으나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5년 기한의 경수로 사업이 합의 3년 만에 착공식을 올렸다. 미국이 한국·일본에 재정부담을 떠넘기려다 아이엠에프와 맞물려 좌초 위기를 맞자 북은 핵사찰 대신 대포동 미사일로 응수했다. 2005년 6자회담에서 끌어낸 9·19 합의도 미국이 마카오 한 은행(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해 위기를 맞았다. 이듬해 10월 북의 첫 핵실험 강행과 유엔 제재로 이어졌다. 중간선거에 패한 부시 정부가 대북정책을 바꿔 협상에 적극 나서면서 2007년 2·13 합의가 다시 이뤄졌다. 북한은 냉각탑까지 폭파하며 비핵화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검증을 둘러싼 북-미 간 이견에다 일본에 이어 한국의 새 정부도 중유 제공을 보류하자 북한은 다시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수십년 쌓인 상호 불신은 디테일에 숨은 악마를 용케도 찾아내 협상을 좌초시켰다. ‘전쟁’을 위협하던 북한의 파격적 변신은 물론 의외다. 그러나 핵과 경제를 두 손에 쥘 수 없을 때 경제를 위해 핵을 포기해야 하는 건 어찌 보면 상식이다.
이슈한반도 평화
연재김이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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