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당랑거철’이라는 한자 숙어가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이 수레를 타고 가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수레를 막아섰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공연히 허세를 부리거나 분수를 모르고 덤빈다는 뜻이지만, 당찬 기백과 용기를 칭찬하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장공이 “사람 같으면 천하에 둘도 없는 용사겠구나”라며 수레를 뒤로 물러 사마귀를 피해 갔다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다. 역사적인 4·27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뒤 도처에서 ‘당랑’이 출몰한다. 그런데 이 당랑들은 기백과 용기와는 관계가 멀다. 제대로 된 상황 인식도, 역사의식도, 미래 전망도, 논리도 없이 오직 허세와 오기, 억지만 있다. 평화와 화해를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무모하게 막아보려는 안간힘이 안쓰럽다. 카오스(혼돈)는 복잡계의 세계다. 역사는 카오스가 나타나는 전형적인 시·공간이다. 그런데 카오스는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라 그 속에는 새로움을 낳는 생명력이 잠재해 있다. 그 결과는 새로운 질서(코스모스)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변화하는 과정이 역사이며 이를 일반적으로 발전이라고 한다…. 요즘 우연히 읽게 된 수학자 김용운 박사의 <역사의 역습>에 나오는 구절 중 인상 깊은 몇 대목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엮어 역사, 정신혁명, 신인류의 등장 등을 다룬 책인데, 북한의 핵무장을 ‘독을 바른 토끼가 늑대 앞에 나타난 상황’이라고 표현한 부분 등이 매우 흥미롭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역사의 유쾌한 역습’을 목도하고 있다. 해결 불능의 절망감만 가득했던 한반도의 카오스가 순식간에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뀌고 있다. 그 변화는 가히 비약적이다. 이 엄청난 변화를 정신병자, 허풍쟁이, 막말의 끝판왕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 자체가 유쾌한 반전이다. 봄바람의 진원지가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욕심 때문인지, 백두혈통 보존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소망 때문인지, 아니면 양자의 절묘한 결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복잡계의 세계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단순계적 사고의 틀에 갇혀 있어서는 그 흐름에서 낙오하고 소외된다. 당랑거철의 고사에서 장공의 수레바퀴는 사마귀를 피해 갔지만 지금 현실은 그냥 ‘패싱’이다. 그만큼 남북문제에 대한 보수세력의 몽니는 존재감도 영향력도 미미하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까지 넣어 국민의 인기도 조사를 해보면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이들보다 더 낮게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극히 비이성적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정상적이고 진정성 있는 면모를 보여주고, 한국의 제1야당 대표는 마치 별나라에서 온 듯한 언행을 한다. 4·27 정상회담 만찬에 야당 대표를 초청하지 않은 데 대한 자유한국당의 볼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홍준표 대표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차라리 남북 당국은 물론 홍 대표 자신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가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태극기부대’한테 욕을 얻어먹을 게 분명하고, 그러니 무례하고 튀는 행동으로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고 만찬장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다. 남북문제에 대한 보수세력의 단세포적 사고는 자유한국당이나 홍 대표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적 여론을 선도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신문이 그동안 펼친 주장을 돌아봐도 끊임없는 오판과 헛된 믿음의 연속이었다. 그런 태도는 정상회담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비판적 평가나 미래에 대한 우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낙관론 경계 차원을 넘어선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골대 앞에서 공을 절묘하게 띄워줬다. 완전한 비핵화의 골을 성공시킬 마무리 책임은 미국에 넘어갔다. 말 그대로 ‘공이 넘겨진’ 상태다. 그동안 보수세력은 한반도의 운명 결정권은 ‘형님’한테 있다고 끊임없이 외쳐왔다. 그렇다면 정상회담 합의문에 비핵화의 구체적 과정이 명시되지 않았다고 트집 잡을 게 아니라 형님이 득점에 성공하길 기원해야 옳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실축을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미국·북한이 변하고 세계가 변하고 역사가 변하는데 한국의 보수들만 변하지 않는 것은 보수를 떠나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보수는 냉정히 현실을 돌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바뀌지 않으려면 최소한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라. 그것이 모두에게 행복이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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