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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정은씨의 ‘매력공세’를 왜 두려워하나

등록 2018-05-03 17:23수정 2018-05-03 19:38

김영희
논설위원

‘매력공세’(charm offensive)라는 단어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소련과 동유럽이 격변하던 1950년대 중반 등장했다. 소련의 매력공세가 민주주의 진영의 경계심을 완화하는 위험성이 있다는 뉘앙스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파격적 모습이 연일 화제가 되면서 보수의 이 매력공세 타령도 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젊은이들 가운데 잔인한 독재자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걱정이다. 독재자가 괴물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감동한다거나 매력공세에 속아 퍼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하긴 파격으로 치면, 인민복 패션과 선글라스를 유행시키고 인터넷에 팬클럽까지 낳았던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뒤지지 않았다. 이번에 김 위원장의 탈북자나 연평도 주민 언급이 주목받지만 그 아버지도 “남한 테레비 어제 오랫동안 봤다”며 “실향민·탈북자의 눈물”을 말했다.

4월2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마술공연을 관람하며 함께 웃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4월27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마술공연을 관람하며 함께 웃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하지만 당시엔 만남 일부가 공개됐을 뿐 긴 생중계는 아니었다. 긴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다 보면 그 태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느껴지는 법이다. 도보다리 30분 회담에서 보였던 진지한 표정은 어떤가. 물론 통 크고 당당한 독재자는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신선했던 건 ‘깍듯한 정은씨’의 모습 아닐까 싶다. 31살 연상이긴 하나 남한의 지도자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꼬박꼬박 ‘제가’ ‘저’라고 표현하고 만찬장에서 조용히 나가 담배를 피우거나 문 대통령 내외를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도록 배려하던 모습은 우리가 알던 ‘오만불손’한 세습자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절박감이든 자신감의 발로이든, 7년 내내 정권 불안정설에 시달려온 30대의 그가 63년 동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지 않았던 길을 가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김 위원장은 경제개혁에 관해선 일관성을 보여왔다. 지난달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회담에서 그가 ‘덩샤오핑의 길을 빨리 걸었어야 했다’고 말한 사실이 최근 전해졌다.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17살의 김 위원장과 열차에서 5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소개한 적 있다. “중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 13억명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의 힘도 대단하고. 식량 수출도 성공적이라고 하더군. 우리가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겠지?” 북한의 뒤떨어진 공업 기술과 전력 부족을 걱정하며 했다는 말이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장마당은 김 위원장 시기 들어 크게 활성화됐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중앙정보국장이던 시절, 서훈 국정원장은 북한의 휴대전화 보급 대수와 이 휴대전화들이 모두 달러로 유통된다는 점을 알려주며 북한의 시장경제 변화를 설명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와 핵개발 속에서도 2016년 북한의 국내총생산은 4% 올랐다. <장마당과 선군정치>의 저자 헤이즐 스미스는 ‘위험하고 비이성적인 무력국가’ ‘북한은 인민들을 굶겨 죽인다’ ‘주민들은 세뇌되어 있다’ 같은 상투적 캐리커처를 버려야 제대로 북한을 볼 수 있다며 “북한은 특이하지만 불가사의한 국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겨우 우리는 ‘위험하고 예측불가능하고 과대망상에 폭력지향적’이라는 북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을 뿐이다.

대화 상대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모습을 ‘매력공세’로 부른다면, 난 두렵기는커녕 반갑다. 이유는 하나, 한반도 평화가 상당 부분 그에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과 70년 질서를 바꾸는 담판에 나서는 자가 자제력 없는 ‘애송이’나 ‘리틀 로켓맨’이 아닌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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