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원
도쿄 특파원
지난달 23일 저녁 도쿄 네리마구 세키마치키타에 있는 소극장 ‘브레히트의 연극 오두막집’에서 <캐러멜>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공연됐다. 이 연극은 재일조선인인권협회 성차별철폐부회가 매년 열고 있는 ‘4·23 행동’ 행사 중 일부다. 4·23 행동은 한반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백한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이 1977년 4월23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을 기념해 여는 행사다. 행사장인 ‘브레히트의 연극 오두막집’에서는 연극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와 관련한 강연과 조선학교 학생들 그림 전시회도 열렸다.
연극은 위안부 피해자 홍옥순 할머니가 오사카 이마자토에서 숨지면서 열린 장례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난한 농가의 딸이었던 홍 할머니는 15살 때 일본에 가서 일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낯선 사람들의 꾐에 빠져 위안부로 끌려갔다. 낯선 이들이 소녀를 꾀면서 당시 조선의 농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캐러멜을 줬다. 연극에 직접 출연하고 각본 작성에 참여한 재일동포 3세 김기강씨는 “캐러멜을 주면서 꾀었다는 설정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록에 실제로 나오는 이야기다. 연극 내용 전체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참고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지옥 같은 위안소 생활이 끝나고도 홍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한다. 술에 취해서 오사카 밤거리를 헤매던 어느 날 생선 상자를 옮기던 여성과 부딪혀 싸움이 붙는다. 그런데 이 여성은 홍 할머니와 같은 위안소에 있던 김숙희라는 한반도 출신 여성이었다. 우연히 재회한 홍 할머니와 김 할머니는 이후 오사카에서 같이 생활한다. 그리고 홍 할머니의 장례식도 김 할머니가 챙긴다. 장례식에는 홍 할머니의 이웃에 살았던 중년 여성, 홍 할머니가 젊은 시절 경영한 술집의 일종인 ‘스나쿠’의 단골손님이었던 할아버지가 찾아와 생전의 홍 할머니에 대해서 회상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은 일본 이름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재일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연극에서는 줄곧 주인공인 홍 할머니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홍 할머니는 만년에 젊은 시절에 타보지 못한 자전거를 타고 싶어 했다. 홍 할머니는 결국 자전거를 타는 데 성공했다. 홍 할머니 자전거의 이름은 ‘레벌루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별로 해보지 못하고 살았던 홍 할머니에게 자전거 타기는 혁명적 행동이었다.
연극 속에서 홍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옥순이야. 한 사람의 인간 옥순이야. 내 몸 위에 일어난 일도,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모두 옥순이야. 그런데 나는 나를 억누르고 살아왔어.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연극에서 위안부 피해의 참상을 직접 묘사하는 장면은 별로 없다. 후반부에 잠깐 등장할 뿐이다. 홍 할머니의 일본에서의 삶의 이력을 묘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이 할애되고, 분위기도 비교적 밝게 이끌어갔지만,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공연된 연극에는 400명 이상이 다녀갔다.
9일 도쿄에서는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렸다. 위안부 피해 문제를 한-일 관계 차원에서 조명하는 일본 언론 기사들이 여전히 눈에 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외교의 문제로 이를 바라보면 이 문제가 개인의 삶의 문제이며 인권의 문제라는 본질적 부분을 놓치게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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