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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피보다 진한 것 / 길윤형

등록 2018-05-22 20:04수정 2018-05-22 20:08

길윤형
국제뉴스팀장

지난 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행기’를 타고 중국 다롄을 방문한 것 같다는 속보가 전해졌을 때 귀를 의심했다. 그는 3월25~28일 중국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했고, 불과 닷새 전인 3일 평양에서 왕이 외교부장을 접견했다. 게다가 북한 최고지도자가 비행기로 외국을 방문한 것은 전례(찾아보니 1965년 김일성이 비행기로 인도네시아 반둥을 방문)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서원들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김 위원장이 아니라는 데 1만원을 걸지.”

틀렸음이 확인되는 덴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오후 2시께 일본 <엔에이치케이>(NHK)가 다롄 공항에서 잡아낸 전용기 ‘참매1호’를 보고 ‘문제의 인물’이 김 위원장임을 직감했다. 이후 여러 정보 가운데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조-중 두 나라는 운명공동체, 변함없는 순치(脣齒)관계”라는 시 주석의 언급도,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동보적 조처”가 중요하다는 김 위원장의 표현도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중앙통신>이 8일 밤 공개한 사진 속에 담긴 김 위원장의 눈빛이었다.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30대 중반 젊은이의 눈빛에서 그가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을 역사의 무게가 느껴졌다. 까딱 한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시 주석을 다시 만나 뭔가 마음을 다잡으려 했던 김 위원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9일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김 위원장의 다롄 방문이 북한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끝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북-중 관계의 오묘함이다.

서로 ‘혈맹’이라며 침을 튀기지만, 북-중 사이엔 생각보다 더 복잡한 출렁임이 있었다. 오직 ‘스탈린 바라기’였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믿지 않았고, 마오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한테 ‘중국이 지원을 해준다면’ 한국전쟁을 시작해도 좋다는 조건부 허락을 받은 김일성은 1950년 5월13일 베이징에서 마오를 만났다. 젊은 김일성은 오만방자했고, 마오는 그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김일성은 ‘6월25일’로 정해진 개전일도 중국에 알리지 않았다. 중국은 27일 정식 통보를 받을 때까지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전황을 파악했다. 그 짜증나는 전쟁으로 마오는 아들 마오안잉, 60만 젊은이의 목숨, 대만을 정복해 통일을 완수할 기회를 잃었다. 북-중 관계 전문가인 선즈화 중국 화둥사범대 교수는 저서 <최후의 천조>에서 “중국인들은 조선에서 많은 피를 흘렸지만, 중·조 지도자와 양국 사이에 깊은 우의는 형성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외교’를 내세우며 양쪽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냈지만 거기까지였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김일성은 마오에게 편지를 써 “우린 혈맹이니 핵무기 제조 기술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소국에 핵무기는 필요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북한은 이후 주로 소련에서 핵 기술을 전수받는다. 냉전은 해체됐고, 북한은 천덕꾸러기가 됐다. 그래도 두 나라는 여전히 ‘순치관계’임을 강조한다.

4·27 남북정상회담의 여운이 가시고 한반도에 다시 암운이 감돈다. 생각해보면, 살벌한 국제정치에서 피보다 진한 것은 많다. 고맙고, 서운하고, 짜증나고, 배알이 꼴렸을 북-중 70년의 세월을 남쪽의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리겠냐마는 지난 정상회담 이후 개설된 ‘핫라인’을 통해 북이 우리와도 소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이 생각하게 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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