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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안보장사 폐업’의 날은 온다

등록 2018-05-23 18:47수정 2018-05-23 21:08

한국전쟁 휴전협상은 무려 2년이나 질질 끌었다. 북-미 회담이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한 번쯤 돌아봐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북-미 협상까지 이르는 길에도 노란불, 빨간불, 파란불이 점멸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할 것이다. 시간이 예정보다 훨씬 지체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김종구
편집인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시작된 것은 1951년 7월10일이었으나 1953년 7월27일에야 비로소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무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엔 연합군과 북한·중국 연합군은 159차례의 본회담과 765차례의 각종 회담을 열었다. 협상 당사자들도 예상치 못한 지루한 밀고 당기기였다. 북-미 회담이 삐걱거리는 현 상황에서 한 번쯤 돌아봐야 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회담은 싸움이다. 다만, 문(文)의 싸움이지 무(武)의 싸움이 아니다.” 북한·중국군 쪽 협상 최고지도자였던 리커눙이 공개적으로 밝힌 협상관이다. 굳이 그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협상은 총성 없는 싸움이다. 설득·위협·선동·유인책 등 모든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입지를 강화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책략의 불꽃 튀는 경연장이다. “협상이란 적을 날카롭게 공격해서 적을 궁지에 몰아넣는 혁명의 적극적인 지류적 공격형태”(1972년 ‘9·25 전투명령’)라는 김일성 주석의 규정은 현재 북한 협상 전략가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을 것이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긴밀히 협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협상은 기세와 기교의 싸움”이라는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협상관도 새롭게 다가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협상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다. 강력한 승부근성, 상대방 후려치기, 예측하기 힘든 엉뚱한 행동, 가격협상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되는 수사들이다. 결국 지금의 정세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온몸에 독을 바른 여우’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한판 대결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북-미 협상이 순풍에 돛 단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협상 이론에서 말하는 협상 방해·지연 요소는 수없이 많다. 자신과 상대방 능력에 대한 잘못된 평가, 협상 의무 이행에 대한 불신, 위신과 체면 손상에 대한 우려 등은 한국전쟁 휴전협상 당시에도 협상을 지연시킨 원인이었다. 지금의 북-미 협상도 당시의 상황을 원용해 분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엔군은 휴전협상 장소로 원산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제시한 반면 북한·중국은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개성을 고집해 관철했다. 이번에 미국은 북-미 회담 장소로 자신들이 원하는 싱가포르를 관철했다. 협상의 1승을 거둔 셈이다. 그런데 연이어 ‘리비아식 해법’ 등의 대북 압박 발언에다, 한-미 연합 대규모 공중훈련 등의 강수를 이어갔다. 북한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약점 때문에 양보한다고 상대방이 여긴다고 생각하는 순간 강경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은 협상 이론의 기본이다. 북한으로서는 위신과 체면이 깎였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협상의 주도권 싸움은 참으로 유치찬란한 경우가 많다. 휴전협상 당시 북한·중국 쪽은 2시간11분 동안이나 ‘침묵 작전’을 벌이고, 회담장의 의자 높이를 상대방보다 슬쩍 높이는 등의 꼼수도 동원했다. 협박과 시위, 감정 자극, 기습 제안, 상대방의 실수 유도 등도 난무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취재할 남쪽 기자들의 명단 접수를 한동안 거부한 것도 당시의 유치한 샅바싸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결국 한국전쟁 휴전회담은 마무리됐다. 이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완전승리가 어렵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다. 강대국의 안전보장을 통해 의무 이행에 대한 의구심도 해소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화는 부분적 승리일 뿐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수 없다. 앞으로 북-미 협상까지 이르는 길에는 노란불, 빨간불, 파란불이 점멸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할 것이다. 도착 시간이 예정보다 훨씬 지체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결국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아무리 사자라고 해도 독을 바른 여우를 단숨에 제압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북-미 회담에 대한 기대가 어긋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또 보수 야당·신문들처럼 북-미 회담이 삐걱거린다고 성급히 환호작약할 일도 아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휴전협상에 반대하며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세력들이 지금 펼치는 ‘대북협상 회의론’도 결국은 ‘멸공통일론’에 닿아 있다. 북핵 해결의 해법도 없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한 주장을 여전히 되풀이한다. 단언한다. 해방 이후 계속돼온 보수세력의 분단장사, 안보장사가 폐업할 날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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