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근
논설위원
침몰, 궤멸, 역대급 패배…. 어떤 수사를 동원해도 어려울 만큼 6·13 선거 결과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자유한국당에선 14일 온종일 반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대적 흐름, 국민 바람을 알지 못했다”(김용태 의원), “기존 보수의 가치로는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없다”(정진석 의원)….
모든 지표가 재앙처럼 보일 것이다. 부산·울산·경남을 더불어민주당에 통째로 내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남 인사를 영입·기용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의 절반을 내주겠다며 연정까지 제안해도 넘지 못했던 지역주의를 국민이 깨버렸다. 강남의 ‘보수 벨트’도 무너졌다. 12곳 국회의원 재보선은 더 충격적일 것이다. 민주당 후보가 출마한 11곳을 모두 내줬는데, 민주당 후보의 평균 득표율이 55%를 넘었다. 2년 뒤 총선을 생각하면, 온몸이 떨릴 것이다. 반성문 쓰고 당 해체를 요구하는 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몸부림이다. 국민 눈엔 뒤늦은 호들갑처럼 보인다.
자유한국당 참패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예견한 것이다. 그들만 모른 체했을 뿐이다. 국민은 수없이 경고했다. 지난 총선에선 친박들이 ‘진박감별사’를 자처하며 보수의 변화를 가로막았다. 표로 경고했다. ‘박근혜 탄핵’을 거치며, 대선에서 거듭 심판했다. 그래도 변화를 외면했다. 당을 접수한 홍준표 대표는 제 사람 심기에 주력했다. 막말을 퍼부었다. 국민은 응징을 별러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14일 오후 여의도 당사에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당사를 떠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그런데도 공천한 인물은 올드보이 일색이었다. 김문수, 이인제, 김태호…. 새 인물 수혈과 혁신으로 민심을 얻는 게 정상인데, 낡은 것은 물러가라는데, 고루한 것으로 자리를 채웠다. 국민은 한반도 평화를 지지했다. 홍 대표와 자유한국당은 선거 당일까지 ‘냉전의 칼’만 들이댔다. 6·12 북-미 정상회담 다음날 홍 대표는 “기껏해야 3년밖에 남지 않은 정권이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의 생명과 안보를 이런 식으로 다룬다”며 “모두 투표장으로 나가 경제파탄 안보파탄 정권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은 투표장에 몰려갔다. 23년 만에 지방선거 최고 투표율 60.2%를 기록했다. 홍 대표, 자유한국당, 냉전과 분열 세력을 응징했다.
홍 대표는 “모두가 제 잘못”이라며 사퇴했다. 홍 대표만의 잘못인가. 그가 독주할 때 의원 대다수가 침묵하고 방조했다. 결국 영남이 밀어주고, 태극기 부대가 지원하고, 지역주의는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에 관성대로 움직였다. “홍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김태흠 최고위원)는 고백도 나왔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건 무능을 자인하는 것일 뿐이다.
달라질 수 있을까. ‘궤멸’했으니 새로운 보수의 싹이 틀 토대는 마련했다. 사람, 노선을 모두 바꾸는 대변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높다. 그런데 대변혁을 주도할 인물도, 방법도 마뜩잖다. “사람이 없어 홍준표가 다시 전당대회에 나올 것”이라는 뒷말이 무성하다. 바른미래당과의 보수 대통합도 얘기한다. 바른미래당도 궤멸했다. 광역·기초 단체장 단 한 곳도 못 건졌다. 합쳐봐야 ‘도로 새누리당’이다.
홍 대표와 자유한국당은 이미 정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역주의를 깨고 수구세력을 궤멸했다. 평화보수, 기득권 세력의 책임을 강조하는 ‘합리적 보수’만 출연하면 금상첨화다. 꼭 자유한국당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상상한다. 민주당이 제대로 보수정당을 하고, 더 왼쪽에서 정의당·녹색당 등 진보정당이 제구실을 하는 정치. 이미 작심한 유권자가 2년 뒤 총선에서 정치지형을 그렇게 바꾼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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