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2018년 6월12일은 70년 동안 적대해온 북-미 정상이 처음 만나 ‘세기의 악수’를 나눈 날로 인류사에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회담 자체보다 그 이후 1시간 남짓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인상 깊었다. 이 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대해 “너무 도발적(provocative)”이라며 북-미 간에 의미 있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엔 훈련을 중지하겠다고 했고,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지금은 아니지만, 어느 시점에선가”는 철수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오랫동안 봉인돼 있던 거대한 역사의 문이 열린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얼마 전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1994~1997)의 오키나와 여행을 다룬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다큐멘터리를 봤다. ‘페리의 고백―전 미 국방장관의 오키나와 여행’이라는 제목이 달린 다큐(2017년 10월 방송)에서 91살의 페리는 1994년 봄 그가 겪은 한반도 전쟁 위기를 담담히 회상했다. “북한의 핵개발 위험성을 확실히 인식한 것은 취임 2개월 뒤인 1994년 4월이었다. 북한이 핵을 가지면 파멸이 온다고 생각했다. 북한이 그것을 쏠 수도 있고, 주변의 일본과 한국이 북핵을 상쇄(offset)하기 위해 스스로 핵무장에 나설 위험이 있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하는 구체적인 전쟁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미국이 얼마나 진지하게 전쟁을 고민했는지는 당시 일본과의 교섭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일본 내 군사기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일본 역시 북한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그들에게 “노”라고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경위는 알 수 없지만, 호소카와 내각이 내놓은 대답은 (뜻밖에도) “예스”였다. 페리 전 장관은 당시 미국이 실제로 “제2차 한국전쟁의 벼랑 끝까지 갔었다”고 말했다. 모두 등골이 오싹해지는 얘기들뿐이다. 방송 내내 그가 강조한 말은 억지(deterrence)라는 한 단어였다. 미국은 왜 기를 쓰고 한국과 일본에 미군을 주둔시키려 할까. ‘억지’ 때문이다. 한-미는 왜 매년 큰돈을 쓰며 군사훈련을 할까. 북한을 ‘억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미국은 오키나와인들의 피 끓는 호소에도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이전해 기능을 유지하려 할까. 이 기지가 북한에 대한 ‘억지 효과’가 있다고 믿어서다. 그동안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을 주도한 ‘현인’들이 믿어온 ‘억지 이론’을 트럼프 대통령은 “도발적”이라며 단숨에 뒤집어 버렸다. 입장을 바꿔 보면, 북한이 핵개발을 한 것도 결국 미국의 침략을 ‘억지’하기 위해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억지는 곧 도발”이라 말한 것과 같다. 미국 대통령이 입에 담기엔 너무 혁명적인 말이 아닐까 생각해볼 뿐이다. 앞으로 동아시아는 어디로 갈까. 북한이 착실히 ‘비핵화’의 길을 가게 된다면, 한-미 군사훈련은 장기적으로 중단되고, 결국 미군 주둔의 정당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불러올진 알 수 없다. 악동이 사라진 동네엔 평화가 찾아올 수도, 북한의 존재로 인해 잠복해 있던 미-중 대결의 맨얼굴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한-미는 한반도 사드 배치가 북한의 핵 위협 때문이라 주장해왔다.) 이 모든 변화가 한국인들에겐 큰 전략적 도전일 텐데,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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