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는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내세운 가장 효과적인 정치구호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좌파적인 정책이 경제의 성장동력을 소진해 국력을 약화시키고, ‘대한민국 정통성 위기’ ‘안보위기’를 불러왔다는 주장이었다. 한나라당의 이런 선거전략은 보수언론의 지원을 통하여 상호보완적인 힘을 발휘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은 야당의 정치적인 승리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보수 기득권층의 선전활동을 통하여 효율적인 여론동원에 성공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이화여대 김영욱 교수의 논문 <선전, 보수세력 그리고 언론>에서)
국가 정체성 혼란과 무능, 이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공격한 보수세력의 핵심 열쇳말이었다. 김 교수의 논문은 대선 당시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지만, 사실 이 공격은 진보정권 집권 기간 내내 이어졌다. 보수언론이 의제를 설정하면 야당이 이를 확대재생산하고, 거꾸로 야당이 불씨를 댕기면 보수언론이 기름을 끼얹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점차 ‘진보정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무능한 집단’이라는 인식이 유권자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리고 보수세력은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보수세력의 이런 프레임은 문재인 정권 들어서도 재연되고 있다. 이번에는 ‘횡포’라는 개념까지 전면에 등장했다. 남북 평화 정책(정체성)에 대한 공격, 적폐 청산(횡포)에 대한 비판, 경제정책에서 실적이 없다는(무능) 조롱이 정권 출범 초기부터 계속 이어진다. 야당과 보수언론의 연합공격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그러나 6·13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선 결과는 이런 전략이 전혀 효험이 없음을 보여준다. 보수 궤멸 현상의 원인과 책임을 분석하려면 야당뿐 아니라 보수언론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다.
이런 현상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세상이 단순계에서 복잡계로 이동했는데도 보수가 구태의연한 전략에 머무는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진보정권을 가장 손쉽게 공격했던 ‘이념적 정체성’ 문제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한-미 간 엇박자로 안보가 불안해졌다”는 단순한 논리가 먹혀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워싱턴의 외교 기득권층’을 비롯한 미국 내 데탕트 반대 세력이 북-미 평화 무드에 계속 딴죽을 걸고 있지만, 정작 한-미 양국 정부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찰떡 공조를 과시한다. ‘한-미 엇박자’니 ‘한-미 동맹의 약화’니 하는 말 자체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눈을 내부로 돌려 봐도 모든 사안이 예전처럼 단칼에 무 자르듯 할 수 없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심지어 최근 예멘 난민 사태에 이르기까지 예전의 전통적 보수-진보 문법에 기대 여론몰이를 하기 어려운 사안투성이다.
그럼에도 보수언론의 태도는 6·13 선거 뒤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북-미 협상에 찬물을 끼얹는 보도, “좌파 싹쓸이”에 대한 우려, 정부의 각종 정책에 대한 날 선 비판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나라 걱정을 증폭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야당으로서는 보수신문의 고군분투가 고맙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야당이 진정 환골탈태, 재생하려고 한다면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적극 동참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보수야당의 핵심 지지층과 보수신문의 핵심 독자층은 분명히 겹친다. 그러나 언론의 경영전략과 정당의 정치전략이 동일할 수는 없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 핵심 독자층의 갑작스러운 이탈 사태를 경험한 보수신문의 일차적 목표는 집토끼 지키기에 있다. 하지만 정당이 지지층의 외연을 확대하는 일은 신문의 독자층 관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태극기 부대의 정서에 매달린 선거전략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했는지는 야당이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6·13 선거가 끝난 뒤 “보수의 재건을 위한 가치 재정립”이라는 말이 부쩍 많이 나온다. 안보와 평화,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효율과 공정 등 모든 측면에서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를 재정립해야 비로소 보수의 활로가 열린다는 주문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무엇보다 ‘진보정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무능하고 광폭한 집단’이라는 보수신문의 의제설정에 계속 매몰돼서는 보수야당의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보수야당 재활의 첫걸음은 보수언론의 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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