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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유라시아 철도의 꿈 / 고명섭

등록 2018-07-05 17:12수정 2018-07-05 19:26

고명섭
논설위원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 하면 먼저 장인의 손으로 빚어낸 조각품이나 공예품을 생각했지만, 동시대 로마인들은 ‘사물’이란 말에서 토목과 건축을 먼저 떠올렸다.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을 세우고 다리를 만들고 길을 닦은 민족이었다. 그 시대 로마의 토목기사 프론티누스가 이런 말을 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스의 미술품은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일상생활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로마인이 남긴 최대의 토목 유산은 로마 제국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도로였다. 반반한 석재를 사용해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든 너비 10m의 가도는 심장에서 뻗어나간 대동맥처럼 수도 로마에서 시작해 지중해 전역을 덮었다. 간선도로만 8만㎞에 이르렀고 지선도로까지 합하면 15만㎞에 육박했다. 얼마나 튼튼했던지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로마가 가도를 만든 목적은 군대와 군수품의 신속한 이동에 있었다. 로마의 길은 정복의 길이었고 전쟁의 길이었다. 반란이 일어나면 군단이 가도를 타고 질주해 서둘러 제압했다. 그러나 길은 한번 닦이면 애초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을 수행하게 된다. 제국이 평화의 시대에 접어들자 변방의 정신문명이 길을 거슬러 로마로 향했다. 서기 1세기 유대 땅의 사도 바울로는 제국의 가도를 따라 전도여행을 떠났다. 소아시아를 건너 그리스 전역을 돌았고 마지막에는 로마에 닿았다. 바울로의 후계자들은 로마 가도를 이용해 기독교를 제국 전역으로 퍼뜨렸다. 정복의 길은 새로운 정신문명의 길이 됐다.

인류가 로마 시대의 드넓은 도로망을 능가하게 된 것은 19세기 철도의 발명 이후의 일이다.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철도 가운데 가장 긴 거리를 자랑한다. 1891년 알렉산드르 3세 때 건설을 시작해 1916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때 완성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제국의 야심과 차르의 영광을 싣고 장장 9400㎞를 달렸다. 하지만 로마의 가도가 그러했듯이 이 팽창과 정복의 길도 완성됨과 동시에 다른 목적에 자리를 내주었다. 완공 후 1년 뒤인 1917년 혁명 열차가 이 철로를 타고 질주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열기는 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없었다면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러시아 전역으로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
그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한반도 종단 철도와 만나 유라시아를 하나로 엮는 문명과 평화의 길로 탈바꿈하려 한다. 지난달 한국과 러시아의 정상이 만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한반도 종단 철도를 연결하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 하원 두마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두고 ‘세계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문명의 길, 평화의 길’이라고 말했다. ‘유라시아 한복판에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길’이자 ‘유라시아 시대를 여는 관문’이라는 말도 했다. 문명사를 대관해 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방의 한나라가 닦은 길과 서방의 로마가 닦은 길이 만나 실크로드가 만들어졌듯이, 한반도 남단에서 서유럽 끝까지 하나의 철로로 연결되면 지구상에 둘도 없는 문명의 대통로가 열릴 것이다.

실크로드는 교역을 위해 뚫은 길이었지만, 결국 문명을 실어 날랐다. 그리스 신화 속 미다스 왕의 당나귀 귀는 1000년의 시간을 넘어 신라 경문왕의 당나귀 귀로 바뀌어 <삼국유사>에 남았다. 머잖아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의 네트워크가 과거의 실크로드 구실을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은 유라시아가 하나가 되는 마지막 과정이다. 유라시아 철도의 꿈이 현실이 될 날을 기다린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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