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지금도 그런 놀이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여전히 하고 있을 게다. 긴장과 공포에서 나오는 짜릿함이 있으니 그 고전적 놀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풍을 가면 늘 하던 모둠짓기 놀이 말이다.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빙빙 돌아라…’ 하는 노래를 다 같이 부르며 강강술래 하듯 돌다가 꼭지가 ‘다섯!’ 하고 외치면 얼른 다섯명이 부둥켜안는다. 모자라면 뜯어다 채우고 남으면 떼어내는 아수라장 속에서 미처 모둠을 못 만든 이들은 당겨지기도 밀쳐지기도 하면서 우왕좌왕했다. 우격다짐으로 들고 나는 게 가능한 자들은 걱정이 없었으되 그렇지 않은 족속(예컨대 나 같은)들은 애절한 눈빛을 보내면서 미리부터 비굴하고도 어리석은 수작을 부려야 했다. 그리고 그 애걸복걸은 번번이 배신당했다. 그 놀이가 너무 싫었다. 말로는 짝짓기 놀이라고 하지만 실은 따돌림 놀이이기도 한 것이다. 미처 끌어당겨줄 곳을 찾지 못해 저마다 뿌리치는 손길 사이에서 여기저기 헤맬 때의 그 황망함이라니. 그보다는 ‘신문지 위에 더 많은 사람 올라가기’ 같은 놀이가 얼마나 좋은가 하고 매번 생각했지만, 언제나 비도덕적이고 매우 정치적(!)이며 공포와 서스펜스 지수가 높은 게임이 선택되기 마련이었다. 학교라는 곳을 졸업하고 더 이상 소풍을 가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 놀이를 잊었는데, 얼마 전에 불쑥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도에 당도한 예멘 난민들의 사진을 보면서다. 어린 시절, 어디에도 끼워주지 않는 모둠 사이에서 헤맸던 그 메마른 당황과 절망의 기억이, 백만배쯤 증폭된 형태로 그들 눈빛에 담겨 보였다. 그리고 한 영화가 생각났다. 몇해 전에 본 <멜랑콜리아>라는 영화다. 소행성 충돌을 피하지 못해 지구는 곧 우주에서 폭발과 함께 사라질 처지가 되었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혼란과 분노와 절망과 슬픔과 이별을 겪으며 쩔쩔맨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주인공만이 매우 침착하게 이별을 준비하고 종말을 맞는다. 그의 우울과 슬픔이 이미 너무나 깊은 본질적인 것이라, 더 깊이 내려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자주 그 생각을 했다. 지구의 종말, 또는 인류의 멸망이 한달 앞으로 예고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마지막 한달의 생을 살아갈 것인가. 처음엔 물론 혼란을 겪겠지만 곧 모든 이들이 잘 소멸하기 위한 지구적 연대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아마도 마지막 열흘 정도는 인류애적 헌신으로 완전 평등, 완전 나눔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이 우주에서 너무나 작은 시공간을 차지했지만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살아왔고 모든 지성과 마음을 동원해서 서로에게 아름다운 종말을 선물하고 소멸하다, 라는 기록을 우주에 쏘아올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끌어안고 마지막을 맞게 되지 않을까. 그때 잘 먹이고 잘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싶은 이가 바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텐데, 그때 우리는 누구를 더 친한 이와 덜 친한 이로 가려낼 수 있을까. 제주에 당도한 예멘 난민들을 보면서 수십년 전의 소풍놀이에서 몇년 전의 영화까지 끌어내어가며 뭔가를 얘기하는 게 참 민망하긴 하다만, 우리 일상에 먼지처럼 스며 있는 배제의 폭력에 민감해져버린 장애자녀의 어미인지라, 우리 아이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밀쳐진 난민이 되어 이 도시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겹쳐 떠오르기도 하고….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