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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진형 칼럼] 청와대는 미투, 여당은 미스리

등록 2018-07-10 18:46수정 2018-07-11 09:46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세금을 논의할 때 우리의 대표자는 어디 갔는지 잘 안 보인다. 선거 때 세금에 관한 자기 의견 밝히기를 꺼리고, 당선 뒤에도 이 과묵함은 계속된다. 대신 우리가 뽑은 적이 없는 관료가 앞에 나선다. 조세 방안을 만드는 일이 마치 자기들 고유 권한인 양 군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국가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겼다. 대의민주제(代議民主制, representative democracy)에서 우리는 선거를 통해 우리의 뜻을 대표할 사람을 뽑는 것으로 주권을 행사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바로 우리의 대표다. 세금을 결정하는 권한은 우리가 그들에게 위임한 권리 중 가장 중요한 주권에 속한다. 따라서 세금은 우리의 대표인 대통령과 국회가 논의해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 대의민주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세금을 논의할 때 우리의 대표자는 어디 갔는지 잘 안 보인다. 선거 때 세금에 관한 자기 의견 밝히기를 꺼리고, 당선 뒤에도 이 과묵함은 계속된다. 대신 우리가 뽑은 적이 없는 관료가 앞에 나선다. 조세 방안을 만드는 일이 마치 자기들 고유 권한인 양 군다.

지난주 벌어진 일만 해도 그렇다. 7월3일 대통령 직속 재정개혁특위가 종합부동산세와 금융소득 종합과세, 주택임대 소득세 등에 대한 조세 강화 권고안을 발표했다. 현 정부 지지자들 사이에선 너무 미약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부의 반응이었다. 발표한 지 단 하루 만에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종부세는 자기들이 좀더 손을 보고, 다른 것은 모르겠다고 했다. 이틀 뒤, 즉 특위 안이 발표되고 단 사흘이 지난 6일, 기획재정부는 특위 안보다 더 완화된 종부세를 발표하면서 나머지는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국민들로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기껏 대통령이 전문가들을 모아 개혁안을 만들어달라고 했으면 좀더 시간을 두고 각계 의견도 듣고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기재부가 단 일주일도 못 기다리고 사흘 만에 자기 방안을 따로 만들거나 그냥 묵살할 거면 특위는 왜 만든 거지?

이번 일을 그저 찻잔 속의 폭풍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리하든 저리하든 큰 그림에선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부세를 보자. 부동산 보유에 따른 세금에서 몸통은 재산세다. 이에 비해 종부세는 곁가지다. 종부세는 재산세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쥐어짜낸 변칙적 조세다. 다른 나라에선 이런 것 안 한다. 노무현 정부 땐 이 변칙을 좀 심하게 한 편이고, 그 후 정부는 여론을 의식해서 아예 없애는 대신 명맥만 남겨두었다.

숫자로 얘기하자. 2016년 부동산 보유 관련해서 거둬들인 세금은 약 14조원이다. 그중 재산세만 약 10조원인 데 반해, 종부세 수입은 약 1조5천억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종부세 세수 중 70% 이상을 법인이 내고 있고 개인이 내는 것은 5천억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종부세 증세는 알고 보면 조족지혈이다. 증세 규모가 특위 안처럼 1조원이든 기재부 안처럼 7천억원이든 모두 새 발의 피다. 피 한 방울이 아니면 피 두 방울이다. 부동산을 20억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번 개편안으로 세금이 40만원이 오르든 60만원이 오르든 무슨 영향이 있나? 이럴 거면 하품하면서 “그건 그냥 댁들이 알아서 하세요, 그런데 재산세는 어떻게 할 겁니까?” 하면 된다.

찻잔 속의 폭풍이라면서 내가 이번 일을 거론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대의민주제가 작동하는 방식, 아니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방식을 이번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중산층에 대한 증세는 없다고 했다. 부자 증세만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런 대통령이 자기 직속으로 재정개혁특위를 만들었다면 정말 부자 증세만 할 건지 아니면 중산층을 포함한 증세도 고려할 건지를 애초에 밝혔어야 했다. 전체적인 큰 그림을 제시하고 특위의 권한 범위를 명확히 했어야 했다. 그래야 중장기 로드맵이고 뭐고 만들 것 아닌가?

그런데 문 대통령은 자기 직속으로 만든 특위의 첫 작품을 관료가 단 사흘 만에 무력화시키도록 허용했다. 보기에 따라선 기재부가 기고만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주인이 주인 노릇을 안 해서 생긴 문제다. 주인이 없으니 하인이 주인 노릇을 한 거다. 청와대 관계자는 금융소득 과세 강화 여부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기재부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주인이 하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한단다. “미투!” 한 거다. 여당도 뒤늦게 자기들도 청와대와 의견이 같다고 나섰다. “미스리!”다.

이게 한국 대의민주제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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