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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조용한 분노’가 끝났을 때 / 김영희

등록 2018-07-17 17:38수정 2018-07-17 19:25

김영희
논설위원

요즘 40~50대 여성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얘기가 딸과의 갈등이다. 우리 또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래,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며 딸들을 위해 희생하던 엄마 세대와 우리 세대는 좀 결이 다르다. “꼭 극단적 표현을 써야 해?” “반발만 키울 텐데.” 친구 말에선 억울함도 묻어났다. “내가 남성중심 조직에서 살아남으려 얼마나 바둥거렸는데.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 아냐?

혜화역 시위는 우리 사회가 어떤 결절점에 와 있다는 징후로 보인다. ‘소수 과격페미’라 치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6만명이다. 전국 단위 그 어떤 단체도 조직하기 쉽지 않은 규모다. 게다가 그 핵심은 1020들이다.

몇해 전 정년을 앞둔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와 한 인터뷰가 부쩍 떠오른다. 97년 금융위기 이후 여성지위 향상이 ‘여성 성공시대’로 변질된 점을 짚으며 그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했는데 아빠처럼 된 건 아닌가”라고 물었다. 혜화역 시위는 이 질문에 어딘가 닿아 있는 듯하다. 지금까진 ‘여성을 더 배려하라, 발탁하라, 이게 남성에게도 좋은 것’이라며 설득만 했다. 그런데 강남역 사건과 수많은 불법촬영(몰카) 피해에서 보듯 여성들의 죽음과 고립과 자책으로만 돌아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남녀가 평화롭게 지내야지’란 말이 사실은 조직 안에서 순응하며 남성을 위협하진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라는 얘기 아니냐는 것이다. 이제 선의든 뭐든 ‘배려’나 ‘원한 풀어주기’는 됐으니 시스템과 룰을 바꾸라는 것, 집단화한 1020 여성들이 사회에 균열을 내는 이 낯선 현상에 어떤 이는 위협감을, 어떤 이는 당혹감을 느끼는 중이다.

불법촬영 문제에 이들이 이처럼 폭발한 건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1020들은 온오프의 초연결성이 기반인 세대다. 수초, 수분 만에 유튜브에서 사진이 퍼져나간다. 신자유주의 시대 정규직도, 가부장도 되기 힘들어진 젊은 남성들에게 여성몰카와 여성혐오는 남성성과 자존감을 찾는 ‘놀이’가 됐고 젊은 여성은 그야말로 ‘먹잇감’이 됐다”고 말했다. 이 디지털 시대에 기성세대가 강조하는 설득과 대화는 유효성을 잃었다. “‘김치녀, 베이글녀 이런 표현 나쁩니다’ 이런 식으로 이성적으로 말하면 진지녀란 융단폭격에 놀림감만 된다. 이들은 정치적·도덕적 올바름의 강조가 최소한의 보호도 못 해준다고, ‘설득의 언어’가 무기력하다고 깨닫게 됐다. ‘미러링’은 전복과 반격의 언어였다.”

아주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이지만 미러링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데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배제가 불가능한 사회에서 ‘남성혐오’적 표현과 여혐 현상을 등치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우려는 남는다. 미러링이 현실적으로 여혐의 확산을 막고 있는가, 막기는커녕 악화시키는 건 아닐까. 여성정책연구원의 이수연 선임연구원은 “혐오표현의 부정적 힘은 확산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시스템과 룰은 특단의 대책으로도 일거에 바뀌지 않는다. ‘남녀 경찰을 1:9로 채용하라’는 주장에 10년차 한 여경은 말했다. “여경 늘려야 한다. 그런데 경찰의 절반 가까이가 지구대 근무고 3·4교대다. 집에 가면 여성이 애 보고 밥 차리는 걸 당연시하는 가정과 사회는 변화가 느린데, 여경 확대만 하는 게 진짜 여성을 위한 길인가.”

혜화역 시위는 분명 여성 안의 차이나 남성들 사이에서도 심화된 불평등 등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젠더 관계에 사려 깊은 답을 내놓진 않는다. 명확한 건 ‘예의 바르고 조용한 분노’가 끝났다는 사실뿐이다. 내달 4일 광화문을 비롯해 과격하고 시끄럽고 울퉁불퉁한 행동들이 이어질 것이다. 증오의 증폭을 우려한다면, ‘설득의 언어’가 유효한 사회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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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a@hani.co.kr

▶관련기사: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여성들이 ‘아빠처럼’ 된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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