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이 있다.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 작품으로 유명하다. 크고 좋은 집, 돈 잘 버는 남편, 귀엽고 기운찬 아들 둘 딸 둘까지. 모든 것이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이 설계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으나 주인공 수전은 행복하지 않다. 가족을 돌보면서 정작 자신이 사라지는 현실을 자각한다.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오롯한 몰입이 가능한 ‘익명의 장소’를 찾던 수전은 호텔로 간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아내가 사라지는 것을 안 남편은? 사설 탐정을 시켜 찾아낸다. 수전은 세상에 의해 발각된다.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나 6시까지 19호실에서 혼자 있다가 간다고 호텔 지배인이 ‘있는 그대로’ 증언했지만 남편은 믿지 않는다. 다른 남자와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애인이 있었듯이 당신도 그랬을 거라며 교양과 관용의 제스처를 취한다. 얼마 전 인터넷 포털 화면도 ‘호텔’이란 단어로 어지러웠다. 위계, 위력에 의한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재판에 대해 “김지은 호텔 잡았다”, “본인이 직접 호텔 예약” 등의 제목으로 여러 개의 기사가 났다. 호텔 예약. 이건 수행비서의 업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맥락에서 저 단어의 조합은 사실판단이 아닌 가치판단을 유도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피고인 주장에 유리한 기사였다. 언론사 사무실에서 저와 같은 제목을 짓느라 말을 고르고 단어를 배치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편집기자의 손놀림과 데스크의 표정과 지시하는 입모양은 어땠을까. 성별이 남자든 여자든 가부장제의 통념과 상식에 길들여진 두뇌에서 나온 합작품일 것이다. <19호실로 가다>에서 아내가 겪는 고립과 절망과 소외를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남편이, 배우자의 호텔 출입을 ‘그렇고 그런’ 빤한 일로 자동 반응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호텔을 가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런데도 여성의 행위는 일 그 자체로 인식되거나 말 그대로 인정되지 않는다. 김지은은 네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미투에서 밝혔다. 이를 두고 처음 폭행을 당했을 때 곧장 사표 내지 않은 게 의심스럽다고들 한다. 반문하고 싶다. 상사에게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당했다고 해서 그 즉시 사표를 제출하거나 고발하는 직장인이, 저항과 권리를 배우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있을까. 사표는 생존과 직결된 결단이다.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 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한 ‘스마트한 여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 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로 시작한다. 안희정 성폭행 혐의 사건은 법리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끝나도 여성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건 성폭행이 계속된다는 말이고, 남성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편집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말하기는 계속 실패하리란 뜻이다. 그러나 견고한 지배질서의 틈을 뚫고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삶을 대동하고 나온 목소리는 말하기에 실패할 때마다 정교해진다는 것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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